어차피 편집 인생 #2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책장을 정리하다가 “굳이 의미를 찾지 말자.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라고 써놓은 메모를 발견했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 써놓은 메모. 아니 내가 이렇게 멋진 말을? 역시 착각이었다. 찰리채플린 씨께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신 말씀이었다. 멋진 글들은 이미 전 세대의 멋쟁이들에게 저작권이 있다.
습관인 것인지, 나는 읽고 있는 작가의 글투를 곧잘 따라한다. 그래서 잘 쓴 작가의 글을 뭉텅이로 읽는 습관이 있다. 따라하고 싶기도 하고, 따라해야 늘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누구 글인지 모르고 문장만 덜렁 남겨질 때도 있다. 다행인 것은 너무 멋진 문장은 내 것이 아니라는 험블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것.
글만 따라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도 따라한다. 분명히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 대화였는데, 따지고 보니 고씨의, 이씨의, 정씨의, 허씨의 얘기들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내용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그대로 옮길 때도 많다. 대화가 아니고 글이었다면 출처와 주석을 다느라 지면을 다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 “000가 000 책에서 그러더라”는 말이 서두일 때가 많은 이유다.
여기서 ‘표절’이라는 말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생각을 ‘표절’하면서 내 생각을 표현하게 된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철학 세미나를 할 때는 먼저 공부한 분들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와야 할 때가 많다. 잘난 척을 하래야 할 수가 없다. 어떤 글에서 이런 상태를 ‘철학 빚쟁이’라고 표현했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에게 생각의 저작료를 일정 부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 선생님들에게는 강의료를 지불했으니까 괜찮나? 친구들에게 간식을 더 자주 사야겠다.
생각에는 저작권이 붙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은 어차피 어떤 형태로든 표현물에 한정된 권리니까. 그럼에도 ‘생각 저작’ 운운하는 것은 나름의 반성이 들어가 있다. 철학 책을 읽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푸코가 원래 그렇지’ 하며 슬쩍 눙쳐버리고, ‘어차피 삼월(우리실험자들 푸코 세미나 반장)이 설명해 줄거야’ 하며 지나쳐버린다.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 공부하려던 것 아니었는지, 그 생각을 삶의 기술로 가져가려던 것 아니었는지 잘도 잊는다. 생각 없이 암기력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늙었는데도 말이다. 누군가의 멋있는 생각을, 멋있는 해석을, 멋있는 말을 필터없이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서 무슨 재밌는 글을 쓰겠다는 것인지 꿈도 참 야무지다 할 수밖에.
그러나 멋진 생각을 빌려 쓴다고 정말 생각 능력을 상실하게 될지 어떨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애초에 어떤 인간에게 세상에 없던 생각이 툭 튀어나오는 게 가능한 것인지, 어떤 생각이 자기만의 고유의 생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수집된 생각들이 모여 내 생각이 되었을 게 분명한데, 어디로 출처를 달아놓아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멋진 생각들을 잘 빌려 쓰는 것이 삶의 기술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잘 편집된 생각이 기발한 생각이 되기도 하고, 재밌는 생각이 되기도 하는 법. 그렇게 편집하고 모방하다 보면 창조의 어머니가 ‘옛다’ 하고 선물을 하사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 이게 조건이다. 일 만분의 일씩 표절하며 사는 삶, 어차피 편집 인생.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고, 먼지 조각 하나가 사라지면 지금 이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누군가의 말이지만 이 말조차 처음 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 너도 나도 어차피 잘 편집된 인생인 주제에 유니크한 척은 제발 넣어두고 시작하자.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