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돌은 과연 리얼한가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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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류학자이자 성이론 실천가인 게일 루빈은 자신의 삶에서 두 번의 커밍아웃을 했다. 한 번은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 두 번째는 자신의 성적 성향을 S/M(사도/마조히즘)이라고 밝히는 커밍아웃이었다.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할 때까지 게일 루빈은 활발한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다. 당연히 첫 번째 커밍아웃은 페미니즘 공동체 안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S/M성향을 밝힌 두 번째 커밍아웃이었다. 게일 루빈이 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뒤에 이루어졌음에도 두 번째 커밍아웃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게일 루빈을 맹렬히 비난했고, 게일이 발표자로 참여하는 학술행사를 방해했다. 비난한 이들은 주로 포르노그래피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이론가들이었다. 이들은 포르노그래피와 성매매, S/M을 같은 연장선상에 놓았다. 포르노그래피는 사회 안에서 여성이 처한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성매매와 S/M 역시 같은 결과를 불러오는 반페미니즘적 행위라는 것이, 반포르노그래피를 내세우는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포르노그래피가 그 자체로 폭력적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한다는 주장. 언뜻 들으면 타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포르노그래피 이외에도 폭력적인 매체나 문화장르는 많다. 슬래셔, 느와르, 액션, 그 외에도 범죄나 공포를 모티브로 한 영상들 역시 포르노그래피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그중 포르노그래피만큼 멸시를 받거나 아예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 매체나 장르는 없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한다는 혐의 역시 한 번도 연관성이 제대로 입증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포르노그래피에 반대하는 이들은 언제나 포르노그래피가 폭력적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장한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아무리 역겹다 해도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포르노그래피의 폐해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현실을 반영한 결과일 수는 있어도, 원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라는 단어는 애초에 성애에 대한 묘사를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이다. 금지에는 처벌이 뒤따르지만, 오히려 금지는 금지하려는 대상을 확산시키기 마련이다. 금지를 통해 포르노그래피는 음지에서 영역을 넓혔고, 포르노그래피를 주로 소비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공간을 제공했다. 주로 이성애자 남성들이 모여 극단적인 성적 취향을 은밀하게 공유하는 이 공간은 명백하게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현실에서와 달리 수치심과 죄책감을 잊고, 아주 뻔뻔하고 자신만만한 존재가 된다.

최근 수입이 허용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킨 리얼돌 관련 이야기를 접할 때, 게일 루빈이 묘사한 1970년대 미국 페미니즘의 반포르노그래피 논쟁이 떠올랐다. 반포르노그래피 논쟁은 당시 여성들의 현실보다는 냉전시대 반공이데올로기, 기독교의 성적 보수주의 맥락과 연결되었다. 생계를 위해 성노동자, 포르노배우, 접대부로 일하던 여성들은 오히려 이 논쟁으로 인해 사회와 더 멀어지거나, 여성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의 직업에서 어두운 면만 보고, 왜 그들이 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일 루빈은 이 논쟁을 시작한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들에게 묻는다. ‘여성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누가 정하는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있는지를 말이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리얼돌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글들을 보면서도 가끔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물론 리얼돌 자체가 굉장히 흉측하고 메스껍게 느껴질 수 있다. 리얼돌을 활용해서 하는 모종의 행위를 떠올린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그것은 아주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감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낀다고 해도 그렇다. 그런데도 당신은 정말 ‘여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지, 그 ‘여성’에는 누가 포함되는지, 누가 당신에게 그런 자격을 주었는지. 혹시 당신 자신의 불쾌감을 과장되게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쁜 예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만, 무책임하다.’ 게일 루빈은 포르노그래피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방식이 편견과 증오, 혐오를 전파시키는 수사였다고 비난한다. 리얼돌이 아름답고 훌륭한 도구라는 말이 아니다. 리얼돌에 대한 아주 나쁜 예를 들어 하는 논쟁들은, 오히려 리얼돌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로 리얼돌의 커스터마이징 기능은 특정인물에 대한 강간을 연상시키고, 작은 크기는 소아성애를 연상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커스터마이징 기능은 포르노배우들이 자신을 모델로 리얼돌을 제작해 판매하는 데서 출발했다. 실제로 본인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 사진 몇 장으로 얼굴을 재현하기는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리얼돌의 작은 키도 소아성애보다는, 이동과 보관 등의 편의를 위해 가능한 상품의 크기를 줄이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극적인 논쟁에 갇혀버리면 리얼돌이 사실은 전혀 리얼하지 않다는 점을 놓치게 된다. 포르노그래피가 이성애 남성들에게 가상의 공간을 제공했다면, 리얼돌은 그 공간의 판타지를 물질화시킨 존재다. 판타지와 현실의 만남이 과연 즐겁고 짜릿하기만 할까. 리얼돌은 오히려 그동안 이성애자 남성들이 포르노그래피를 통해 추구하고 소비했던 판타지의 빈약함 혹은 괴이함을 드러내줄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무 변화도, 반응도 없이, 그저 인간을 조금 본 따 만든 인형. 천만 원을 훌쩍 넘는다는 인형의 쓰임새와 기능이 그렇게 협소해서야, 가성비도 가심비도 누리지 못한 채 남는 것은 무지막지한 카드할부대금과 진한 현자의 시간이 아닐지.

리얼돌이 여성의 모습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해서 여성의 인권과 관련되었다는 말은 지나친 비약이다. 현실에는 그런 ‘여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가의 리얼돌을 통해 남성들이 추구하는 것은 성적 판타지의 실현이지, 진짜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다. 리얼돌은 물질화된 몸을 가진 괴이한 존재로 여전히 판타지의 공간에 남아있다. 현실에서 리얼돌은 ‘아내’나 ‘여자친구’의 역할을 전혀 대신할 수 없다. 남성들이 파트너에게 원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맞벌이는커녕 청소나 빨래, 요리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성관계 시에도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는 여성을 원할 만큼 이 땅의 남성들이 능동적인 슈퍼맨인 것도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서도 한 인간의 삶에서 성과 관련된 부분만 분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리얼돌은 단순히 여성의 몸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 분리불가능성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현실에는 그런 여성이 없기 때문에 리얼돌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리얼돌이 전혀 리얼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성행위를 보조 혹은 대신하는 기구의 활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리얼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큰 상품이다. 아마도 은밀하게 보관할 게 분명한 용도의 상품이 크기가 이렇게 크고 관리가 힘들어서야, 어찌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능에 비해 과도한 규격과 디자인은 이 상품의 원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이다.

타인의 외모, 타인의 성격, 타인의 취향, 타인의 성생활은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장애인이나 노인 커플, 흉측한 외모, 동성애, 셋 이상의 참여, S/M이나 도구를 활용한 성행위 등이 그 예이다. 어떤 행위는 용인되지만, 어떤 행위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거기서 오는 불편함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우리의 자유다. 그러나 그 타인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눌 자격은 누구도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 리얼돌 논쟁이 촉발되는 지점은 아마도 타인의 성생활 혹은 판타지에 대한 불쾌감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내가 불쾌감을 느낀다고 해서 누군가의 행위나 상상이 꼭 비정상이거나 범죄와 연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