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영화는 가능할까

[ 준민 ]

:: 줌인준민

//

곤궁의 영화. 김응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 <우경>을 이렇게 부른다. 감독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인 ‘우경’을 촬영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우경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둠 속에서 그의 뒷모습을 수동적으로 찍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감독은 그 곤궁함이 영화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말한다.

 

검은 초상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우경이 먹고, 듣고, 일하고, 씻는 그의 일상이 담긴 장면들이다. 두 번째는 ‘출연 안우경’이라는 자막을 시작으로 우경의 여행을 찍은 장면들이다. 이 두 개의 파트는 일상과 여행이라는 아주 다른 풍경을 찍은 듯 보이지만, 우경의 뒷모습과 옆모습이 주된 피사체라는 점에서 비슷한 구도를 가진다. 또한 두 파트 모두 마지막 컷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우경의 초상이 담긴다. 관객은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야 영화의 주인공인 우경의 초상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우경의 초상이 조금씩 비춰지는 장면들도 있지만, 모두 옆을 보고 있거나, 밑을 보고 있거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검게 찍힌 장면들 뿐이다. 마지막 컷을 제외하면, 영화는 우경의 온전한 초상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인간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그 인간의 초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인물 다큐멘터리는 어떤 영화 장르보다도 주인공에게 이입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우경의 검은 초상은 관객이 그에게 이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모르는 대상에 대한 묘사를 의미한다.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섣불리 묘사해서는 안된다거나, 어떤 대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선 그 대상과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내면을 봐야한다거나, 관객이 대상에 이입해 모종의 감정이나 연대를 일으켜야 한다는, 기존의 좋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특징들을 이 영화는 모조리 무시한다.

어떤 영화들은 이입이 안된다거나, 와 닿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얼마 전 개봉한 <벌새>의 어떤 장면이 와 닿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치자. 물론 <벌새>를 비판할 순 있지만, 그 도구가 이입이나 와 닿음이 되어선 안된다. 나는 <벌새>의 모든 장면이 와 닿지 않았다. 94년에 다섯 명의 가족과 함께 대치동에서 자란 여성 중학생의 이야기에 93년에 태어난 외동 아들인 내가 어떤 장면에 와 닿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영화의 모든 장면이 와 닿지 않았다고 <벌새>를 비판해도 된다는 이야기일까? 그런 비판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이 시덥지 않은 비판을 싫어하는 나에게 <우경>은 어떤 영화보다도 더 풍요로운 풍경을 가진다. 김응수 감독은 대상을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르는 타자를 묘사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그 방법은 초상을 최대한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관찰자적 양식과 극영화

감독도 말했듯이 <우경>은 피사체를 수동적인 시선으로 찍은 것처럼 비춰진다. 우경의 일상과 여행을 어떠한 개입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영화학자 빌 니콜스는 이러한 다큐멘터리를 관찰자적 양식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관찰자적 양식에는 질문이 따른다. 과연 그 관찰이 윤리적인가?

어디까지 관찰할거며, 관찰에 대한 동의는? 동의를 받았다고 해도 영화는 탄생부터가 편집이었으니, 관찰당한 대상이 어떻게 묘사될지는 감독 빼고 아무도 모른다. 예를 들어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공공기간을 촬영할 때는 자신에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참여자들에게 최종 결과물에 대한 그 어떤 통제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우경은 자신이 묘사된 영화를 필연적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카메라의 윤리는 우경을 찍을 때 더욱 민감해져야 한다. <우경>은 이 문제점을 피해간다. 첫 번째 영화는 위의 문단에서 썼듯 타자의 초상을 묘사하지 않는, 검은 초상을 만드는 방법을 썼다. 이와 반대로 두 번째 영화는 극영화적인 방법론을 선택했다. 여행 장면들은 하나의 극영화이다. ‘출연 안우경’이라는 자막은 극영화가 시작한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두 번째 영화에서 우경은 끊임없이 강, 산, 바다와 같은 풍경들을 바라보고 감독은 그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감독은 우경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잡아주기도 하고, 우경이 시각장애인임에도, 그의 시점 숏까지 찍는다. 감독과의 인터뷰를 보면 여행지 또한 우경과의 대화로 정해진 장소들이다. 여기서 윤리의 문제점은 당연히 사라진다. 감독은 단순히 대상을 관찰한 게 아니라 대상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느슨한 태도에서 양식은 사라지고 풍요가 남는다. 만약 감독이 고집스러운 형식을 취하는 다큐멘터리스트였다면,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영화에서 우경의 뒷모습은 그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는 감독의 고민이 담긴 풍경이 된다. 감독은 우경이 커피를 내리는 장면을 찍기도 하고, 설거지 하는 장면을 찍기도 하고, 뜨거운 뚝배기를 맨손으로 옮기는 장면을 찍기도 한다. 반면 두 번째 영화에서 우경의 뒷모습은 여행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잘 짜여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경의 뒷모습은 지극히 극영화적인 풍경이 된다.

 

낯선 장면들

둔감한 사람들은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간 우경이 시각장애인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경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의도적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우경은 스틱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영화에는 스틱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감독은 일부러 그런 장면을 넣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 대신 낯선 장면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한다.

예를 들어 우경이 음성변환 프로그램으로 책을 읽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우경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공을 쳐다본다. 감독은 우경의 뒷모습을 점점 더 클로즈업한다. 명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책을 읽는 중이다. 읽는 사람의 눈은 감겨 있고, 책을 읽어주는 기계음만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우경의 정강이에 상처가 났다. 아마도 밖에 나갔을 때 다친 상처같다. 그는 상처에 빨간 약을 바르려 하지만 상처 바로 밑 맨살에 빨간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상처는 밴드에 가려지지 못한다.

왜 이 낯선 장면들이 좋은 걸까? 그 이유는 이 장면들이 대상에게 다가가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대상을 어떤 방법으로 찍어야 할지 고민한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생각과 대상을 갖고 촬영에 임한다면, 그 생각에 맞는 장면들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과정의 즐거움은 얻지 못한다. 위의 장면들은 불확실한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대단한 미학적 기획을 통해 얻어진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 장면들은 그 자체로 우연이 만든 활기이다.

(참고자료 – 네이버 영화 <우경> 줄거리, [인디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것 ‘인디포럼 월례비행’ <우경> 대담 기록)

영화를 만들고, 얘기하면서 먹고 살고 싶지만,
꿈은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