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전장에서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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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는 스스로를 치우의 후손이라 여긴다. 치우는 전설의 인물인데, 중국의 시조로 숭상되는 황제黃帝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워 패배했다 전해진다. 만약 탁록의 전장에서 치우가 승리했다면 천하의 판도는 지금과 다르지 않을까?
이와 비슷한 상상으로 동이족 서사가 있다. 서쪽에서 발흥하여 은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가 실은 동이족이었다는 이야기부터, 나아가 한자가 실은 동이족의 문자였으며, 위대한 사상가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였다는 이야기까지. 이렇게 보면 우리 민족, 동이족은 중국 문명의 진짜 주인공인 셈이다.
여기에 신묘한 해석을 더하면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어느 누구는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이 실은 ‘알이랑’이라 말한다. ‘알’은 히브리민족의 유일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는 ‘알이랑’, 기독교의 유일신과 너랑나랑하는 사이였다는 말. 이젠 태초부터 선택받은 민족이 되어 버린다.
한자와 선민의식이 만나기도 한다. 배를 뜻하는 ‘선船’은 배를 뜻하는 ‘주舟’에 ‘팔八’과 ‘구口’를 더한 글자이다. 즉, 여덟(八) 사람(口)이 탄 배(舟)에서 만들어진 글자라는 말. 여덟 사람이 탄 배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 신묘한 해석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를 노아와 그의 세 아들, 그리고 각각의 부인을 가리킨 것이라 본다. 노아의 방주에 탄 여덟 사람에서 ‘선船’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다는 말. 이렇게 우리 동이족은 한자에도 성서의 비빌을 숨겨 놓았다.
그러나 사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대에 ‘선船’이라는 글자를 만든 이가 그 제작 원리를 글로 남겨두었을 리 없으며, 처음으로 아리랑을 흥얼거린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며 노래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반박할 근거가 없으니 이런 상상은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편리한 도구 덕택에 더욱 널리 퍼지고 있다.
참 재미있는 해석이니하고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지나치기에는 뒷맛이 씁쓸하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해석이 권력을 낳고 그 권력이 폭력을 용인한 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성서에서 노아의 저주를 받은 아들 함이 흑인의 선조라는 해석이 그렇다. 백인은 노아의 첫째 아들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자기 인종이 우월하다는, 뿐만 아니라 흑인이 열등하다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아냈다. 이렇게 인종차별은 유구한 뿌리를 갖는다.
자신의 우월함을 논하는 해석은 상대적으로 타자를 향한 멸시의 시선을 내포하고 있다. 치우, 동이족 등의 서사는 우리네가 중국인보다 우월하다는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 중국인은 부당하게 천하를 차지한 근본없는 인간떼일 뿐이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문명의 전장에서 탄생하는 법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중국 역사를 보면 중국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은 동쪽의 오랑캐, 동이족이 아니었다. 중국은 북쪽과 서쪽의 유목민족에 수 없이 시달렸다.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도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든 게 아니었던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흉노열전>을 통해 당시 흉노족의 위세가 어땠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는 천자와 동등하게 스스로를 여겼으며 때로는 황제보다 더 높다고 여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황제에게 서신을 보낼 때 황제가 보낸 것보다 더 큰 서판에 이렇게 써 보낼 정도였다.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워주신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묻노니…”
이런 소박한 자신감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독특한 풍습이다. 그들은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다며 매우 당당하게 말하곤 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야 하니 힘세고 강한 자를 우선한다는 것이다. 맛있는 고기가 있으면 응당 전사에게 먼저 주고 노인은 맨 마지막에 먹는다.
흉노의 싸가지 없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흉노열전>은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 자리를 차지하는 묵돌선우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자신의 명령을 가차없이 따르는 심복을 길러내기 위해 몇차례 시험을 치른다. 자신이 아끼는 애마를 죽이라는 명령에 우물쭈물하는 이의 목을 베었다. 애첩을 죽이라는 명령에 우물쭈물하는 이의 목을 베었다. 오롯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만 남자 기회를 보아 자기 아비를 죽이라 명령한다.
정조는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던 인물이다. 그는 정약용과 박제가를 불러 자신이 가려뽑은 <사기>의 대목을 정리하게 했는데 이 책이 <사기영선>이다. 북방 오랑캐의 이야기, <흉노열전>도 여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정조는 제 아비를 죽인 묵돌선우 이야기를 빼버렸다. 그런 불온한 이야기는 응당 삭제해야 한다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노인을 하대하는 흉노의 이야기는 효孝라는 가치가 농경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아비를 죽인 묵돌선우의 이야기는 권력의 쟁취란 본디 저렇게 비정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친부 살해가 매력적인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그러나 정조에게 흉노의 이야기는 그저 좀 재미난 오랑캐 이야기에 불과했을 뿐이다.
문득, 문명의 변방에서 왜 치우와 동이족을 제 뿌리로 삼았는지 궁금해졌다. 수천년간 중국을 위협하고 나아가 제 고유의 문화를 당당하게 역설한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문명의 전장 또한 문명 위에 펼쳐지는 사건일 뿐이다. 그럴싸한 문명에 자신을 덧대고자 하는 욕망은 오랑캐의 서사를 배제한다. 하여 이 문명의 전장, 신묘한 상상력의 세계는 의도적으로 한편을 무시한다.
근대사의 굴곡은 문명의 전장을 뒤집어 놓았다. 중국은 그저 야만의 공간으로 취급될 뿐이다. 시끄럽고 지저분하며 무례한 중국인의 표상은 현재 우리의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상대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홍콩 문제로 시끄럽다. 중국 연예인들은 잇달아 한 중국인 기자의 말을 따라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내놓았다. 실사 영화 <뮬란>의 배우인 유역비의 선언은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영화를 보이콧 하겠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
이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뮬란>은 중국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한 화목란花木蘭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에 나간 주인공은 구국의 영웅이 된다. 공개된 실사영화 포스터에는 뮬란이 든 검에 忠勇真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다. 국가에 바치는 충성, 남자 못지 않은 용감함, 그 마음을 한결같에 유지하리라는 다짐을 담은 것이리라. 그러나 이 세글자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없다.
위국헌신을 연기한 배우가 국가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은가. 보이콧 목소리 가운데는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뮬란 배역을 맡길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누구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압제에 항거하는 배역을 맡으면서 어떻게 경찰 폭력을 지지할 수 있는가?”(#BoycottMulan how tone deaf do you have to be to support police brutality when you just filmed a character who is supposed to stand against oppression in its raw form? Pound sand. / BBC 코리아 8월 17일)
참고로 뮬란이 맞서 싸운 것은 흉노족의 우두머리 선우였다. 압제와 항거가 과연 무엇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되지 않은 표현 ‘in its raw form’, 야만적인 방식으로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야만과 싸우는 문화 영웅 뮬란이 어찌 중국편을 들 수 있느냐는 합리적인 지적.
북방 오랑캐, 흉노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마천은 중국이 오랑캐의 얼굴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 이 뒤틀린 문명의 전장에서 이런 질문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중국 배우 류이페이劉亦菲는 왜 유역비로 소개되었을까? 홍콩 시위를 이끄는 활동가의 이름은 ‘피고 찬(鄭皓桓)’으로 소개되었을까?
‘뮬란’을 한자로 쓰면 목란木蘭,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는 ‘무란’에 가까운 발음이다. 이는 봄에 피는 꽃의 이름으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목련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2019.08.20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