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팔랑입니다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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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무능력자가 되어간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또 그 말도 맞다. 비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모두 이해가 되는데, 어느 지점에 대고 비판의 칼날을 세워야 한단 말인가. 황희 정승같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바람에 따라 이리 펄럭 저리 펄럭대는 깃발이다. 스스로 “팔랑귀로 특허를 내야할 지경”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듣는 귀는 열려 있는데, 입은 자꾸 닫히게 된다. 네 말도 옳고, 그래 네 말도 맞다! 그래서 고정 레퍼토리가 생겼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서 그렇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 나이 들어서까지 쌍심지를 켜고 싸우고 있다면 그것도 꼴사나운 일일 수 있겠지. 누군가는 사는 게 편해서 그렇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산전수전의 결과로 매꼼한 팔랑귀 하나 얻었다면 그것도 나쁠 것 없겠지. 누군가는 기득권이라서 그렇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비판해야 할 기득권 하나 정도는 가까이 둬야 사는 게 재밌겠지. 그들의 잣대로 나이든 사람, 사는 게 편한 사람, 이미 득한 사람이 되는 일도 나쁘지 않다. 그들이 어떻게 보든, 그들의 기준에서 내놓은 답이 내게 정답일 수는 없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 뿐.

내가 현재진행형 팔랑귀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현재진행형 방탄귀가 옆에 딱 달라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말도 튕겨내고, 의심하고 보는 방탄귀를 가진 동반자. 그는 “방탄귀로 특허를 내야 할 정도”로 방탄에 능하다. 팔랑귀가 득한 정보는 방탄귀의 논리에 의해 대부분 제압당하기 때문에 팔랑거리면서 생길 수 있는 위험요소가 미리 제거된다. 맘 편하게 팔랑거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자 그 때문이다. 방탄귀들은 들려오는 정보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다. 의심하고 비판하면서 판단을 늦추고, 판단이 섰다 싶으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날카롭게 칼날을 휘두른다. 비판하는 자는 뭔가 (멋)있어 보인다. 논리정연한 비판이 얼마나 폼나는 일인지 대부분이 수긍할 것이다. 설사 논리가 정연하지 않고, 목소리만 큰 비판조차도 비판하는 자의 어깨가 뿜뿜 올라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우매함의 봉우리(더닝-크루거 그래프)에 있을지언정 본인은 그 사실은 전혀 모를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덩달아 비판능력자가 되고 싶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팔랑의 능력치만 올라간다.

팔랑귀로 사는 사람은 일상에 작은 재미가 잔존(잔존의 미학)하지만 대부분은 무료하다. 누군가와 갈등을 겪지 않으니 고민할 인간사가 없다. 돈 문제조차 “그래, 그럴 수도 있지”의 영역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 돈을 주지 않는 클라이언트도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엔 왜 내 돈을 주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여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아이쿠, 무서워라”하며 돈을 줄 클라이언트는 세상에 없더라. 돈은 정확히 내게 올 바로 그 시점에 들어오는 것이다. 가족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가족 중의 누군가다. 내가 가르칠 대상도 아니고 기대할 대상도 아니다. 더구나 가족문제만큼 합리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야가 또 어디 있으랴. 아, 이게 팔랑귀랑 무슨 관련이 있냐고? 말했지만 팔랑귀는 상대가 내뱉는 말에 대부분 수긍한다. 그 시점에 그 상황에 그런 삶을 산 사람의 주장이 수긍되면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지금 처해진 본인의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될밖에.

분명 “깊고 치밀하게 사고하는 것이 삶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경험도 한 몫 하고 있다. 삶은 내 사고의 깊이와 고민의 농도와 상관없이 본인의 길을 가는 것 같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와는 별개로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갑작스런 사고, 죽음, 어이없는 해결,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논리적인 사고를 비웃으며 예고도 없이 등장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조차 기존에 고수하고 있던 생각들로 풀어나가는 게 아니다. 번뜩이는 생각, 기지, 빌려 쓰는 애매한 답, 신체가 가진 반응력으로 어찌 저찌 상황을 모면한다. 그렇게 모면한 순간들이 어떨 때는 신묘한 해결책이 되어 있기도 하고, 다시없을 전복의 순간이 되어 있기도 한다.

최근 들어 팔랑의 강도를 더 느끼고 있는 것은 진행 중인 철학세미나의 강도와 비례할 것이다. 그 어렵다는 인문학 텍스트를 매일 끼고 살면서도 굳건한 내 주장 하나를 심어놓지 못한다. 팔랑귀로 사는 일의 고단함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랬다 저랬다”. 삶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부를 붙들고 있는 것이 맞다면 가치관이든 철학이든 확고한 기둥을 세워나가야 할텐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팔랑거릴 뿐이라니! 어쩌면 ‘보편’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누군가의 ‘특수’라고 주장하는 미셸 푸코의 텍스트를 4년째 붙들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푸코를 공부할수록 확고한 시금석보다는 눈치빠른 건축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올라오는 중이다.

내 안에는 아직도 “깊고 치밀하고 차분하게 사고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래서 팔랑이는 나의 상태에 대한 반성과 조롱이 정당하다는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습성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다.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나무는 뿌러질지언정 뽑히지는 않을 것이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사고는 다른 생각들을 만나면 쉽게 뽑혀버리는 잡초와 같다. 잡초같은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하루살이 사고쟁이다. 잡초는 뿌리깊은 소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잡초는 잡초의 근성으로, 소나무는 소나무의 근성으로 살아가겠지. 팔랑귀에 대한 적지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기질에서 일소하지 못하고 친구하면서 사는 까닭은 역시 타고난 팔랑귀 체질이서일까.

상황이 이렇다면야 팔랑귀를 떼어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괜스레 소나무 코스프레 하다가 괴상한 생물되지 말고 팔랑귀 능력치나 키워볼까(큰 팔랑귀를 휘적이는 것도 괴상한 생물이긴 마찬가지지만). 잡초같은 팔랑귀로 사는 일에 진짜 안심하며 살아가려면 일단 “잡초로 사는 것은 틀리고, 소나무로 사는 것이 맞다”는 생각부터 들어내야 하겠다. 푸코는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우연성으로부터 현재의 우리가 더 이상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기존에 행하거나 사유하는 것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행하도록 나를 이끌고 있다. 이런 이행의 과정은 분명 잔존의 미학이 있다. 이런, 팔랑귀를 열심히 조롱하다가 일단 팔랑귀로 살아가 보자니! 푸코를 등에 업고 오늘도 제법 팔랑거린다.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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