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찬양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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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갑작스럽고 대응은 미숙하기 마련이다. 아마 죽는 날까지 그렇겠지. 

지난주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사건은 적잖이 내 삶을 흔들어댔다. 덕분에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좁아터진 속알머리로는 전사가 되기는 글렀다는 점. 적어도 기습에는 턱없이 취약하여 쓰린 속을 붙잡고 한참이나 끙끙대야 했다. 둘째, 잘 싸우는 것만큼 상처에 대처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점. 완벽한 승리는 없으니 얼마간의 피해는 ‘미리’ 감수해야만 한다. 셋째, 본디 싸움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승리를 막기 위해, 더 정확히는 약자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도 모르게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사건을 간단히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건물주와 계약 문제를 두고 언쟁을 벌였다. 본디 사건을 재구성하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 볼까 했으나 잘잘못을 따져 뭣하냐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한다. 자고로 공자가 말하지 않았나.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군자는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무엇을? 질문을. 

그러므로 이렇게 묻자. 그는 왜? 따져보면 이것은 소인의 질문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태도라 하겠다. 교훈과 반성은 짧게, 추궁과 비난은 길게. 암, 없는 것은 재물이요 가진 것은 시간이라 끙끙대며 궁리하기에도 좋은 소재이지 않나.

내가 며칠간 질겅질겅 곱씹은 질문이란 이것이다. 어찌하여 그는 내가 ‘권리’를 꺼내들자 그토록 버럭 화를 낸 것일까? 대관절 세입자란 무엇이며 건물주란 무엇이기에, ‘권리’에 그토록 치를 떨며 분노한 것일까? 멀찍이 떨어져 보면 두 개의 권리가 충돌했을 뿐이다. 하나는 건물주의 재산권, 또 하나는 세입자의 계약갱신권. 허나 그는 권리를 입에 담기도 전에 으르렁댈 수 있었고, 나는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권리라는 이름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권리’란 무기가 아니었다. 그는 권리 없이도 마음대로 을러댈 수 있었지만 나는 권리를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비탈진 세상은 더욱더 기울어져 다가왔다. 권리란 훌륭한 방패도 아니었으며, 도리어 약자로 내던져진 내 삶의 헐벗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그래, 이 대결의 진면목은 필시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무엇을 건드린 것이다. 권리와 권리는 한번도 맞부딪혀 싸우지 않았다.  

하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 하지 않나. 태초에 조물주는 ‘있으라’라는 명령으로 여럿을 만들어냈다 한다. 그렇지만 그 신성한 명령은 오늘날 무용지물이다. 참으로 조물주의 권능이 있다면 집과 토지를 넉넉하니 끊임없이 만들어 냈을 것이다. 허나 그 신통한 능력도 ‘집이 있으라’, ‘토지가 있으라’ 하지는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아마 이를 기록한 고대인들이 건물주라는 새로운 신성 권력이 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기 때문일 테다. 그들은 미처 ‘내꺼다’라는 말의 거룩함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따져보면 논란이 있기는 하다. 성서는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 25:23 이하 공동번역)”라고 말한다. 애초에 토지에 대한 배타적, 영구적 소유란 불가능하다는 말씀. 그리하여 성서에서는 정기적으로 매매한 토지를 원상태로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희년), 가난한 자들에게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런 동족을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한다.”(레 25:36) 본디 성서의 조물주는 건물주, 토지 소유주 편이 아니었던 셈이다. 

아차차! 이런 기묘한 생각을 해봐야 무엇하나. 그가 조물주를 무서워하는 사람인 줄 어찌 알겠으며, 그가 성서의 저주를 아는 사람인 줄 어찌 알겠는가.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짓밟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신 27:19) 손바닥만한 땅 덩어리 하나 가진 것 없이 2년마다 재계약을 걱정하며, 이리저리 부유하는 삶이 ‘떠돌이’가 아니면 무엇인가? 성서의 기록이 유효하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리라. 그렇지만 나도 알고, 그도 알며, 조물주도 똑똑히 알 것이다. 세입자를 내치는 건물주는, 설령 과부와 고아를, 이민자와 난민을, 아이와 노인을 내치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누구든 털끝만한 저주를 받지 않을 것임을.

나라님이 정한 세입자의 정당한 권리 따위는 물론, 조물주가 언급한 나그네에 대한 환대, 소수자에 대한 관심 따위는 전혀 고려할 것이 못된다. 그러니 이럴 수밖에.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이르기를, 다달이 월세를 내어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나의 살이니.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가 빵을 떼어 나누어주었듯, 건물주는 제 소유를, 제 살을, 제 피 같은 건물을 나누어 베풀어주는 셈이다. 매달 건물주를 기념하여 월세를 꼬박꼬박 납부하는 것은 물론 그를 찬미하며 칭송하여야지. (건물)주는 미쁘시고 은혜로우시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볼 것인 바, 혹자는 나의 이런 말이 지나치다 여길 것이다. 어떻게 성찬聖餐을 월세 납입에 비유하느냐고. 헌데 따지고 보면 오늘날 교회의 많은 이들은 천국 부동산의 땅 한 뙤기를 구매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 저들의 천국에서 나사로는 여전히 넓고 커다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그는 십일조를 이미 천국의 곳간에 쌓아 두었으니.

그렇지 않다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이다. 토지가, 건물이, 만물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하느님의 것을 제 것이라 하는 자에게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이웃을 내치며, 약자와 난민을, 나그네를 내버려 두는 자를 가만 두는 것일까? 하늘에서 저주가 내기리는커녕, 그를 저주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건물주는 가깝고 조물주는 멀기만 하니 질문은 삼키고 건물주를 섬기는 것이 지혜로운 법이다. 배타적이고 영구적이며 신성한 건물주의 소유를 찬양! 이래야 할진데, 믿음이 부족하여 건물주에게 ‘권리’라는 이름으로 대들고 말았으니 이 죄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물주에게 지은 죄는 누가 사하여주는 걸까? 그것도 그의 거룩함 도전하였으니 아마 지옥에 떨어지는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어떻게 하나. 성 밖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수밖에. 저 컴컴한 저승에 내 자리가 있으리라.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을 밀어낸다지만, 저승에 집터를 마련하고 어둠 속에 자리를 까는 일밖에 나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구덩이를 향하여 “아버지!” 하고 구더기를 향하여 “어머니!”, “누이!” 하고 부를 몸인데, 희망이 어디 있으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욥 17:12-15)

결국 날카로운 질문은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건물주에겐 죄가 없고, 설사 있다면 조물주가 뭔가 잘못한 거다. 그것을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니 회개하고 참회할지라. 어찌하여 나는 지혜와 순종을 지니지 못하였는가. 그러니 억지로라도 꾹꾹 씹어 삼킬 말이다. 조물주보다 건물주를 찬양. ‘날 구원하신 주 찬양’이 아니라 ‘나에게 임대하신 주 찬양’!!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