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한 잔소리를 생각하다②_비판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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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글 말미에 고병권의 짧은 글 <비판이란 무엇인가>(『다시 자본을 읽자1』의 부록)를 읽고 이제는 딸에게 쉽게 잔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썼습니다. 내 잔소리가 대부분 ‘교정으로서의 비판’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알고 난 후 나는 겁을 먹었었습니다. ‘이제 우리 딸과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해서요. 참 슬픈 일이죠, 잔소리 말고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을 하다니 말입니다.

뭔가를 알게 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골치 아픈 일입니다. 까딱하면 타인을 무자비하게 재단하는 새 잣대가 되는가하면, 아는 것이 병이 되어 괜한 우려를 새로 떠안게도 되니까요. 그런데 이런 건 모두 머릿속에서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새 잣대를 감히 한번 써보면요, 현실에서 바로 깨집니다. 이 앎을 반박할 수 있는 무수한 예들 자체가 바로 현실이니까요. 제 걱정도 그렇게 깨지더군요. 우리 모녀 사이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잔소리 말고도 많은 얘기를 우리가 나누고 살더라구요. 잔소리를 빼니 얘기할 맛이 더 나는지 딸의 얘기는 더 많아졌습니다. 나는? 많은 경우 듣는 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제 딸이 그렇게 거슬리지 않게 돼었는지 궁금합니다. 사태는 이렇습니다. 딸과 마주한 그 순간 나는 오직 딸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내 지식에 의한 판단은 유보되고, 어지럽혀져있는 딸의 방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 앞에 있는 딸의 지금 이 순간은 아무 것도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좀 거창하게 말하면 ‘창조’되는 것 같습니다. 부지불식간에 머릿속으로 끼어드는 나의 지식은 의식으로 잠깐 붙잡습니다. 물론 떠오르는 순간 이미 판단까지 끝난 것이지만 기다립니다. 비판하거나 방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판단대로 한 것이 성공이라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딸에겐 그 모든 것이 처음 것일 테지요. 실패가 처음이니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것도 처음입니다. 딸의 그 모든 처음을 즐겁게 보아낼 수 있습니다. 엄마라고 본인의 경험과 지식으로 그 처음 길을 방해할 자격은 없습니다. 점점 더 나는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니체와 철학』에서 니체의 ‘긍정’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나는 즐거워하며 읽었습니다. 니체는 ‘생성으로서의 존재’를 긍정합니다. 실은 생성과 존재는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면 서양 철학에서 내내 대립적이면서 양 극단에 위치한 개념이었습니다. 존재는 정지한 것이고 생성은 변화하는 것을 의미했지요. ‘존재는 변한다’라고 할 때도 일단 ‘정립되어 있는 존재’가 변하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니체는 ‘생성으로서의 존재’라는 개념으로 존재와 생성을 결합시킵니다. 생성으로서의 존재란 변화함 자체를 존재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계속 변하고 있는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기쁩니다. 표정들과 몸짓들, 그들의 순간을 주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변했고, 변하고 변할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해결책을 내놓을 수도 없죠.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겁니다.

이 이론의 기쁨은 현실에서 또 다른 걸림돌을 맞이합니다. 당장 이런 말이 들리죠. ‘아니, 비판도 못하고 옳은 소리도 못하고 그러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그런 나쁜 짓을 해도 잘했다 그래야 하냐!’라고요. ‘생성으로서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나는 니체가 저런 질타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할 수 없이 극악한 폭력이라 할지라도 니체는 긍정해야합니다. 니체는 대신 이렇게 말하겠죠. ‘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삶은 비극적이다. 그러한 존재들의 충돌, 따라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아니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러한 존재들의 삶이다. 삶이란 고통을 배제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고통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대립에도 고통이 있습니다. 부모의 고통은 그런데 자식의 고통을 제거해주고 싶은 의도를 주장하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잔소리란 보통 그런 것이지요. ‘네가 이 사회에서 도태돼지 않고 살아가려면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내 말을 따르라’는 강요요. 이런 강요는 바로 자식의 반발을 유발합니다. 부모의 고통은 니체를 따라보면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식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음으로서, 차후에 자식의 고통을 자신이 봐야하는 ‘그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오히려 고통의 반대입니다. 즉 삶에 대한 부정입니다. 위와 같은 식의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음은 고통이 오면 달게 받겠다는 뜻이고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엄마인 나와 자식의 삶 모두를 긍정하는 것 말입니다. 

니체의 절대 긍정 속에서 어떻게 비판이 가능한 지, 나는 의외의 수확을 하나 얻습니다. 니체의 긍정 속에는 삶(고통)에 대한 부정이 없습니다. 따라서 삶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집니다. 삶을 회피하려는 모든 시도, 즉 비극적 삶을 카타르시스로 해소하려는 모든 변증법적 시도, 현자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철학 그리고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잔소리는 딱 종교적 형식입니다. “내 말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성공하여 나와 네가 고통을 피할 수 있으리라”. 나는 이런 식의 잔소리,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이 시도를 딱 멈추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이요.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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