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이 문제다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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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이 문제다. 대한항공이 땅콩 때문에 괴로워지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대한항공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가 술에 취한 채 기내에서 승무원을 괴롭히다가, 강제로 비행기를 회항시킨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현아는 대한항공의 부사장이었다. 시비의 발단은 땅콩 서비스였으며, 이 사건은 이후에 ‘땅콩회항’이라고 불렸다. 덤으로 이 사건 이후 우리나라 최대 항공사였던 대한항공은 ‘땅콩항공’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재벌가의 흉측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이 사건은 이후 사람들이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사람들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한 구석 제대로 된 인물이 없었다. 차관의 딸이라는 조현아의 어머니 이명희는 분노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욕쟁이였다. 자식들에게도 여과 없이 분노를 표출하며 키웠던 듯한데, 자식들도 하나같이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다. 다들 학업능력도 떨어져서 하프 같은 구하기도 힘든 악기로 예술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외국의 대학교에 기부금을 내고 입학하여 경영 공부를 겨우 마쳤다. 물론 공부를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집안이 집안인지라 능력이 뒤떨어지는데도 회사의 주요직책들을 하나씩 맡았다. 능력 있는 직원들을 거느리며 묻어가는 처지에 좀 고마워해도 될 법한데, 걸핏 하면 화를 내고 폭언에 집기를 던지는 등 폭행을 일삼았다.
최근 사망한 아버지 조양호 회장 역시 권위적이고 부패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직원들에게 불필요한 의전을 강요하고, 항공기 조종사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 일화가 많다. 무능력한 자녀들에게 기업 운영을 맡긴 것도 모자라, 불법으로 재산을 증여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조양호 회장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한진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조양호의 아버지 조중훈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의 물자 수송을 전담하면서 기업을 키웠고, 박정희 정권과 매우 밀접하게 교류했다.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을 한진그룹이 운영하게 된 이유도 박정희의 권유 때문이었다.
무능력한 총수 일가가 아무리 위태롭게 해도 끄떡 않던 기업에 균열을 일으킨 건 바로 땅콩이다. 대한항공이 유난히 사랑하던 그 간식, 심심풀이 땅콩 말이다. 승무원이 땅콩 봉지를 뜯어주지 않는다고 부사장이 분에 못 이겨 비행기를 돌린 그 사건. 시작은 그때였을까. 얼마 전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의 대표이사 연임이 부결되었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의 연임을 반대한 탓이 크다. 그렇다고 지분 11.56%를 가진 국민연금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마도 이건 땅콩의 힘이다. 조양호 회장의 연임안이 부결된 직후 대한항공의 주가는 연일 상승했다. 땅콩은 우리에게 기업과 기업운영자의 운명이 분리되어 있고, 각각 다르게 흘러갈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한편 대한항공은 최근에 자신들이 사랑해 마지않던 땅콩서비스를 중지하기로 했다. 비행기를 탔는데, 땅콩을 안 준다니! 맥주 안주로도 좋고, 심심할 때 간식으로도 좋은 그 땅콩을 안 주겠다니! 땅콩 때문에 괴로웠던 조양호 일가의 복수란 말인가. 복수보다는 알레르기 때문이다. 땅콩은 알레르기를 흔하게 유발하는 음식이라, 알레르기 환자들을 위해 땅콩 대신 다른 간식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알레르기 때문에 땅콩을 제공하지 않는 항공사들이 많고, 대한항공에도 그 동안 땅콩으로 인한 민원이나 사고들이 많았다. 폐쇄된 공간에서는 직접 섭취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레르기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민원이나 사고들에도 불구하고, 대한항공은 그동안 좀처럼 땅콩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땅콩 때문에 총수 일가가 곤욕을 치르면서도 그들의 땅콩사랑은 여전했다. 대한항공이 땅콩을 포기하게 만든 이들은 미국에 사는 두 소년들이다. 지난 3월 땅콩알레르기가 심한 두 소년이 한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가기 위해 미국에서 출발했다. 일단 한국까지는 무사히 도착. 두 소년의 어머니가 심각한 땅콩알레르기를 항공사에 미리 알렸기 때문이다. 델타항공은 소년들이 탄 항공기에서 땅콩서비스를 중지했다. 그렇다면 대한항공은? ‘땅콩항공’이라는 별명답게 땅콩을 포기할 수 없었던 대한항공은 두 소년의 탑승을 거부했다. 조현아가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회항시켰다면, 두 소년들은 땅콩 때문에 강제 회항을 당한 셈이다.
이후 대한항공은 미국 항공사와 소년들의 가족에게서 거센 항의를 받았다. 미국의 반응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소년들과 가족을 비난하는 여론이 많았다. 두 사람 때문에 몇 시간이나 ‘땅콩을 먹을 권리’를 박탈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다면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권유 아닌 권유도 있었다. ‘땅콩을 먹을 권리’와 ‘땅콩알레르기로 생명을 위협받지 않을 권리’가 동등하게 취급당하는 일을 놀라워하는 이는 드물었다. 더구나 다수의 ‘땅콩 먹을 권리’를 위해 소수의 알레르기 환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라니.
‘땅콩회항’ 사건 때 여론이 조현아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면, 이번 사건에서는 땅콩알레르기 소년에 반대하는 편에 서는 듯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조현아가 갑질을 통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행복을 침해했다고 느껴 분노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항공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땅콩을 먹는 소소한 즐거움을 단 두 명의 소년들 탓에 놓치게 되어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갑에게 당하는 을의 처지를 비관하고 분노하지만, 더 약하고 소수인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사회의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비난과 엄포가 날아든다. 보조를 맞추어 걷지 못하는 이는 행렬의 속도를 떨어트리거나, 대열을 흐트러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열된 경쟁의 스트레스는 불공정한 강자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른데,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을 시작할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만, 폭력은 경쟁이 공정하게 진행되어도 질 수밖에 없는 쪽을 향한다. 혐오의 발현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혐오는 약한 자에게로 흐른다. 한때 땅콩이 갑질의 도구였다면, 이번 사건에서 땅콩은 약자혐오의 도구가 되었다. 자, 여기 우리의 ‘땅콩 먹을 권리’를 위해 비행기에서 쫓겨나고 미국까지 강제회항을 당한 소년들이 있다. 조현아처럼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땅콩이 이번에도 물음을 던진다. 그러니까 땅콩이 문제다.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