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히어로와 페미니즘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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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자본의 산물이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영화는 기회의 땅 미국의 헐리웃에서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다. 미국 이상으로 영화의 발전에 기여한 나라는 소련이다. 미국이 영화를 산업으로 보았다면, 소비에트는 영화를 혁명의 도구로 보았다. 헐리웃이 영화의 흥행을 원했다면, 소련은 선전 효과를 기대했다. 자본과 국가는 서로 경쟁하듯 영화산업의 규모를 키우고, 선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들을 발전시켰다. 지금도 우리는 두 종류의 아주 다른 영화가 있다고 믿는다. 흥행을 바라고 만든 재미있는 영화와, 재미는 없지만 메시지가 확실한 영화가.
영화는 자본의 산물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예술에 속한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전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에게도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원한다. 헐리웃과 소비에트는 모두 더 많은 흥행과 선전효과를 위해 노력했다. 서로가 구축한 시스템과 영화기술들을 차용하면서, 흥행을 위한 영화와 선전을 위한 영화의 이분법은 점점 사라졌다. 이제 영화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흥행을 추구하는 동시에 메시지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흥행을 보장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장르이다. 장르의 공식을 통해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면 단기간 흥행은 보장되지만, 관객들은 쉽게 질려버린다.
계속해서 흥행을 추구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려면,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장르의 고정관념도 깨주어야 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비틀어주고 정해진 예상경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마니아가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장르 특유의 재미와 흥미는 보장되어야 한다. 재미가 보장되지 않거나, 장르 자체가 해체되어버리면 열광하던 관객들은 금방 등을 돌린다. 21세기 영화산업은 영화제작자와 관객 사이의 이러한 호응과 미묘한 갈등구도를 통해 유지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 영화시장을 휩쓸고 있는 ‘마블’을 통해 그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코믹스(만화책)에서 시작된 ‘마블’의 영화들은 장르 시스템 안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히어로물이다. 시대를 거듭하고 마니아가 확산되면서, ‘마블’ 영화에서 장르의 전형성은 조금씩 변형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변했다. 과거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젊고 잘생긴 백인 남성이었다. ‘마블’에서 내놓은 히어로물의 주인공 중에도 백인 남성이 많은 편이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주인공의 성별이나 인종, 연령이 다양화되는 추세이다. 흑인이나 여성히어로는 물론이고, 중년이나 청소년 히어로도 등장한다.
등장인물의 구성 변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세계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고 치자. 백인 남성이 아닌 이가 히어로가 될 때는 백인 남성만 세계를 지키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의 전달이 가능해진다. 백인 남성이 아닌 관객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흑인과 여성, 청소년과 중년 히어로들은 그렇게 세계를 지킬 임무를 새로이 부여받았다. 우리는 ‘마블’을 통해 흥행과 선전의 효과가 기묘하게 섞여 극대화된 영화들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들은 흥행을 위해 만들어졌으면서도, 일종의 혁명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다.
최근 ‘마블’이 내놓은 여성히어로 캐릭터 ‘캡틴마블’은 그런 의미에서 유독 눈에 띄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지 않은 여성히어로인 ‘캡틴마블’은 낯선 존재로 외면을 받거나, 한편에서는 열광을 받았다. 다분히 의도한 결과로 ‘캡틴마블’은 ‘마블’ 내에서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영화 속 ‘캡틴마블’의 서사와 대사들은 페미니즘의 혁명적 메시지를 구현하려고 애쓴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의 절정은 ‘캡틴마블’이 악당과 싸워 이기는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 악당과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부분이 영화의 쾌감을 가장 강력하게 증폭시킨다.
“나는 너에게 증명할 게 없어.”
‘캡틴마블’은 남성캐릭터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능력을 억제할 필요가 없을 때, 남성의 인정 역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증명할 게 없다’는 말은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기준에 미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로서 증명과 인정에 매달려왔음이 밝혀지는 순간, ‘캡틴마블’은 우리와 유사한 누군가가 된다. 나아가 증명과 인정을 거부하면서 ‘캡틴마블’은 진정 히어로로 거듭난다.
자신이 소수자라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능력을 증명하고 인정을 받는 일에서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다. 이 사회의 여성들은 늘 수퍼히어로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한다. 육체적 한계까지 뛰어넘어가며 남성보다 못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캡틴마블’이 우리와 달리 증명과 인정을 그렇게 쉽게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캡틴마블’은 이미 히어로이기 때문이다. ‘캡틴마블’은 자기 능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증명과 인정이 자신을 더 강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 통제와 노역의 수단에 불과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적을 스스로 응징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능력을 증명하고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유사한 존재로 느껴졌던 여성 ‘캡틴마블’은 평범한 우리와 다른 히어로가 되어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그 적을 응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남성보다 강한 여성히어로의 존재는 여성도 때로는 남성보다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모든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사실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캡틴마블’의 말 ‘증명할 게 없어’에서 ‘증명할 것’을 ‘증명할 필요’로 보기 쉽지만, ‘증명할 능력’이 없다는 말로 바꿔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히어로가 아닌 대부분의 우리는 ‘증명할 필요’보다는 ‘증명할 능력’이 없을 때가 많다. ‘증명할 능력’이 없어도 우리는 ‘캡틴마블’만큼 당당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여성의 강함과 우월함을 증명하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강하거나 우월하지 못해도 당당하게 ‘증명할 게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무기가 페미니즘은 아닐까. 페미니즘의 시대는 여성히어로를 통해 도래하는 게 아니라, 굳이 여성이 히어로가 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될 때 도래하지 않을까.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