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이야기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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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에서 쓰다

루쉰이 일기를 썼다. 보통 일기는 하루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지만 이번에는 잡지에 투고할 요량으로 썼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기를? 원래 일기는 혼자 보려고 쓰는 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제목도 이상하다. 원제가 「마상 일기(馬上日記)」라 되어있다. 말 위에서 쓰는 일기라니.

내용은 더 이상하다. 불과 몇 달 전, 『화개집』에서 북경여사대 사건으로 천시잉 교수와 싸울 때와는 딴판이다. 음식이야기, 위장병 때문에 약 타러 갔을 때 생긴 일, 아껴먹고 있는 곶감사탕이나 집안일을 봐주는 아줌마와의 신경전, 밀린 월급 타기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원래 일기란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쓰는 일이라서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약국에서 생긴 일

「마상 일기」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약국 이야기다. 그날의 약국풍경은 이랬다. 계산대에 외국인 하나 나머지는 멋지게 차려입은 중국인 청년들. 이들은 미래의 고등화인(高等華人)이다. 고등화인은 하층민과 상반되는 식자층이자 상류계층을 일컫는 말이다. 매꼼한 차림새의 이들은 은근슬쩍 약값을 속인다. 상대가 모르는 줄 알고 무시하는 거다.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하층민이 된 기분이라고 루쉰은 말했다. 그리고 내민 처방전과 약병.

고등화인만 이상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약값을 실랑이하는 루쉰과 약국점원을 보고 있던 손님으로 온 사내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사내는 루쉰의 약을 아편 끊는 약이라 굳게 믿는다. 아무리 루쉰이 아니라 해도 막무가내다. 급기야는 점원에게 재차 확인까지 한다. “이거 아편 끊는 약 맞지요?”

왜 이런 글을…. 여기까지 별 감흥을 못 느끼면서 모종의 의문을 누르고 자세히 읽어봤다. 장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것은 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다. 단편 영화의 컷들을 모아놓으면 이런 풍경이 될 것 같다. 루쉰이 집을 나서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허탕치고 어느 건널목을 건너고 이런 약국에 들어가고. 그 다음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루쉰의 동선이 주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사실 그대로 찍혀진 느낌이다.

 

‘음’이라는 말

“저거 아편 끊는 약입니까?” “아닙니다!” 점원이 나를 대신해서 명예를 지켜주었다. “이거 아편 끊는 약입니까?” 그는 결국 나에게 직접 물어봤다. 만약 이 약을 ‘아편 끊는 약’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드는 듯 마는 듯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대로 좋은’ 답을 내놓았다. “음, 음…..” (『화개집속편』, 「즉흥일기 속편」, 그린비, 421쪽 인용)

루쉰은 일기 형식으로 약국에서 생긴 일을 사실 그대로 써 놓았다. 여기에 관념적 언어나 서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하지만 ,사실 그대로만 써 놓은 걸로는 뭔가 부족하다. 약국에서 생긴 일이 정말 ‘일’이 되려면 사건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음’에 주목한다.

“음, 음….” 이것은 음성이 아니라 말이다. 음성과 말의 차이는 뉘앙스에 있다. ‘음’에 어떤 의미가 실려 있기에 말이다. 이것은 약국점원과 사내 양방향 모두를 향하고 있지만, 약국점원과 사내 너머에서 출현한다. 이 말은 “약값을 속이면 안돼요.”라든가 “사람 말을 못 믿다니 어리석군.”과 같은 말과는 다른 길을 간다. 고둥화인이라 불리는 상류층의 약삭빠름과 자기가 믿고 있는 것과 다르면 죽어도 눈을 못 감을 하층민의 우매함 모두를 향한 언어가 ‘음’이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서 힘 빼지 않으면서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루쉰의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 진다.

루쉰은 ‘음’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답이라 했다. 여기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 주의하자. 그는 회색이나 중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회색이나 중용은 기회 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붙으려는 포지셔닝이다. 그에 반해, 루쉰의 태도는 정확히 비판이다. 그러나, 비판이면서 대상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의 말과는 다른 방식의 비판이다,

‘음’을 사건으로 보는 이유는 비판의 기능과 더불어 그것의 다의성 때문이다. 약값을 속이려는 점원과 우매한 사내 모두를 향한 중층적 의미가 ‘음’ 안에서 기능하고 있다. 중층적이고 다의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단편 영화의 일상적 스틸 컷들 속에 숨겨진 어떤 디테일을 찾아내는 것이 영화를 보는 묘미라면, 루쉰의 일기가 바로 그렇다. 그 역시 이런 에피소드를 굳이 씀으로써 이 말을 들어야 할 구체적 대상이 있다. 이 글이 투고될 잡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1925년부터 북경여사대 사건으로 계속 싸워오고 있는 사람들인데, 대부분이 교육당국 관계자들이다. 흥미롭게도, 사건으로서의 ‘음’이 가지는 효과는 듣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의를 모호하게 만들기 쉬운 말이라는 것에 있다. 이 말만 듣고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니까 루쉰은 일기로 ‘멕이는’ 글을 쓴 것이다.

그는 약국에서 돌아와 이런 글을 쓴다. ‘음’의 방식으로, 문학과 공리를 들먹이며 사람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그들을 향해. 『화개집』을 처음 쓰던 1925년에서 26년으로 시간은 지나갔다. 그러나 해는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어서 책이름이 여전히 『화개집』이다. 여전히 같은 문제와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책은 제목을 붙이고 서문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보내면 끝나겠지만, 끝나지 않는 싸움과 같은 책 『화개집속편』과 같은 일들은 얼마나 더 화개집속편의 속편 또 그 속편의 속편으로 이어질지.

 

말 위에서도 쓰다

글을 쓰는 도중에 알게 됐는데, 마상(馬上)이라는 말은 ‘즉흥적’이라는 말이란다. 그래서 제목도 「즉흥일기」다. 원제의 ‘마상(馬上)’이라는 말이 재밌어서 내 멋대로 풀어보자면, 말 위에서 쓰는 일기란 말 위에서‘도’ 쓰는 일기다. 말이 전투를 위한 것이라면, 혹시 「마상 일기」는 전투 중에 쓰는 글이 아닐까. 전투 중에는 말 위에서 먹고 말 위에서 잔다. 싸움이 일상이 된 루쉰이 쓰는 글. 그래서 이 글은 소재의 측면에서 즉흥적이고, 내용의 측면에서 의도적이다.

일기라는 형식의 그 시시콜콜함 속에 숨어 있는 깊숙하고 날카로운 잠재성을 상상해보는 일은 즐겁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자기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시하기에 대놓고 말하기도 애매한 기분을 주면서 루쉰은 쓴다. 영문도 모르는 채 이러저러한 일들이 무심히 왔다가 또 지나가고, 어쩐지 하는 일마다 조금씩 어긋난 어느 날의 일상을 그는, 쓴다. 꽤 오래 일상을 잊고 있었다. 너무 큰 것만 좇느라. 이런! 반성은 재미없는데.

                                                    2019. 4. 2. 어찌어찌하여 미미 씀.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