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현실의 경계에 대하여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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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임도 스포츠다

2011년 게임회사 NC Soft가 야구단을 창단하려 했을 때 롯데를 비롯한 기존 구단주들은 반발했다. 게임회사와 스포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면서. NC Soft측은 그 이유에 수긍했다. 수긍과 더불어 이런 주장을 펼쳤다. ‘우리는 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스포츠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그들을 스포츠와 친해지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지금은 게임과 스포츠를 구분하는 설정 자체가 많이 낡았다. 컴퓨터나 영상장비를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스포츠에 포함시켜 일렉트로닉 스포츠(electronic sports), 줄여서 e스포츠(eSports)라고 부르는 시대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주장과 진부한 논의가 오가는 2011년의 저 사건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현실과 게임의 오랜 갈등이다.

사실 기존 야구 구단주들인 롯데, 삼성, LG, SK, 한화 등의 기업이 펼치는 사업들 역시 스포츠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NC Soft의 야구단 창단을 막기 위해 이들이 한, 게임회사와 스포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은 낡은 동시에 얄팍했다. 얄팍한 주장 뒤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내 굴지기업을 자처하는 자신들과 게임회사는 급이 맞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한편 게임회사인 NC Soft측에서는 현실세계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픈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애들 오락거리 팔아먹는 회사라기에는 당시 이미 NC Soft의 규모가 많이 커져 있었다. 물론 게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더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국내 굴지의 기업들과 자신들을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게임회사의 열등감은 그렇게 현실세계로의 침투력을 강화시켰다.

 

2. 게임의 중독성과 폭력성?

그러다 이제 게임과 현실이 중첩되는 시대가 왔다. 현실에 가상을 추가한 증강현실 게임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식출시되기 전부터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GO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증강현실 게임은 가상의 게임세계를 현실에 중첩시킨다. 이제 더 이상 게임을 하기 위해 집 안에 있거나, 한 장소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동력이 게임의 결과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게임을 하기 위해 포켓몬GO 유저들은 기꺼이 속초행 버스를 탔고, 부지런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무리 게임과 분리된 현실세계만을 추구하려고 해도, 게임은 자꾸만 현실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변화를 침입으로 인식하고 불안해한다. 게임은 질 낮은 오락거리에 불과하다는 판단, 게임의 폭력성이 현실의 범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게임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현실의 삶과 분리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 멸시에서 공포까지, 불안의 형태와 종류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몇 번의 클릭으로 살상을 반복하는 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명을 경시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많이 죽여 본 이는 그만큼 많이 죽어 보기도 했다. 부활이 가능하다해도 죽음에는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 모든 플레이어는 공평하게 1레벨부터 ‘녹슨 칼’ 같은 조잡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시작한다. 게임의 스토리를 따라 비슷한 여정을 거쳐 각자가 영웅이 된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부터 좋은 무기를 가졌거나,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영웅이 되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비슷한 여정을 거쳤기에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주 서로를 돕는다.

물론 게임 세계에도 약탈과 협잡과 테러가 존재한다. 그렇다고 게임세계의 약탈과 협잡과 테러가 현실세계보다 심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 게임세계 안의 관계가 익명으로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면 더욱 그렇다. 정말 주목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히려 현실세계의 문제들이 게임 속으로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강한 자가 되어 갑질을 하고 싶다는 현실의 욕망은 게임세계를 현실처럼 만들어버린다. 문제는 게임의 폭력성이 아니라, 현실의 폭력성이다.

게임의 중독성에 대한 걱정에서도 문제의 초점은 게임에만 맞춰져 있다. 왜 현실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느냐는 질문 안에는 수많은 무지가 숨어있다. 게임에 대한 무지, 현실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 무지가 확고한 신념으로 이어진 이 발언이 언뜻 그럴듯한 충고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게임하는 아이에게 강제로 공부를 시키기 위해 게임을 금지해도, 아이는 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공부하기 싫음’이지 게임의 중독성이 아니다. 게임중독은 게임세계의 달콤함보다, 현실의 활동에서 더 이상 생산적인 기쁨을 느낄 수 없을 때 올 수 있다.

 

3.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증강현실 게임이 상용화될 미래를 예상하고 그려냈다. 게임이 상용화될 미래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드라마 전체에는 게임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현실과 가상이 중첩되는 증강현실 게임 안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살의를 느끼고 공격할 때, 그 살의가 실제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게임 안에서 죽은 캐릭터는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니, 영원히 죽지 않는 좀비와의 결투가 시작된 셈이다.

게임을 소재로 하고, 게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드라마에서도 이처럼 게임에 대한 두려움이 포착된다. 게임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그 두려움을 소멸시키는 거대한 희생제의를 통해 마무리된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증강현실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에서 리셋이라는 희생제의를 통해 사라진 버그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게임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90년대의 세기말 디스토피아 감성과 닮아있다. 명백하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며,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1990년대에 상상하던 2020년을 떠올려보자. 상상은 늘 정확하지 않은 법. 언제나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틀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상상에 기댄 두려움은 끈질기게 남아있다. 두려움이 끈질기다면, 현실은 강력하다. 이미 게임과 현실세계를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언제까지 2011년 당시의 야구 구단주들처럼 게임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 발언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그게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현실에서 분리되어버린 사람이 아닐지.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