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모를까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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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아픈 엄마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서둘러 전화를 누르는데 잘 눌러지지 않거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거나 하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엄마의 안위를 확인해야 하는데 멍청하게도 그걸 놓치고 있었다는 자책으로 황망해하다가 깨는 꿈. 현실은 이미 엄마가 돌아가신지 14년째임에도. 그래서일까.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훅 올라올 때가 있다. 정말 놓친 것은 없는지 해야 할 일들을 되짚어보지만 현실은 ‘없는데?’라며 멀쩡한 얼굴을 내비친다. ‘진짜 없어?’라고 다시 물으면 현실도 조금 당황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

진짜 없어? 다시 물으면 당황하는 현실 혹은 나. 실은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잊은 것은 어쩌다 다시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것을 새로 알게 되기란 쉽지 않다.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조차 이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오래 살았고, 비슷한 기억의 슬라이드가 겹쳐 있어서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가 나인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다. 지금을 살아내기에도 벅차다는 표현은 너무 진부한가. 아무튼 방금 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의 타래를 엮어가는 일도 예전같지는 않다.

모르는 것은 더 난관이다. 나라는 존재는 내 의미의 지평 안에서 보고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지평선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나는 내 인식의 지평 너머의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없다. 처음 본 얼굴조차 누구랑 비슷한 것 같은 어떤 얼굴로 곧바로 치환해버리는 것이 우리의 뇌다. 모든 것을 익숙한 지평 안에 끼워 맞추고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배치해버린다. 그래야 편할 테니까. 불상의 어떤 것이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양자 세계를 뚫고 나타난 9년 후의 어벤져스 같은 것?(너무 갔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저 코스튬 쩌네, 라면서 지나갈 게 분명하다. 지평 너머의 뭔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저 기적일 수밖에 없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것이 있다. 뭘 모르는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오류를 알지 못하는 현상이다. 결정도, 결과도 그게 잘못된 것인지 모를 만큼의 무능력. 어떻게 보면 능력인 것 같은 무능력이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뭘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반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한다는 의미도 있다. 모르는 사람은 타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오류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닝 크루거 효과를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활용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나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스스로의 오류쯤은 감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일어난 오류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신이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는 나나 그들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느냐, 자괴감을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부심을, 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괴감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지나고 보면 무식해서 용감했던, 그래서 낯을 화끈거리게 하는 그런 일들이 있다. 다 알았다면 행동하지 못했을 그런 일들. 그런 결정과 결과들로 지금의 내가 요모양 요꼴인 것일 텐데, 안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내린 그 어떤 결정도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 내린 결정일 수가 없다. 알고 있는 한에서,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내 의미의 지평 안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구분 또한 평생 한결같을 수 없다. 나와 다른 지평을 가진 사람은 나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 그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누가 평가해줄 수 없다. 지평이 다름을 인정한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분쟁 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뭘 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태, 뭘 모르는 상태, 뭔가를 늘 잊고 있는 듯한 상태. 이런 상태는 익숙한 지평 안에 있던 것이 아니다. 분명 확신하고, 또렷하고, 뭔가를 많이 알았던 것 같은 상태에 머물렀던 기억도 있다. 세상이 구분지어 놓은 성공의 잣대, 고숙련 노동자 신체가 되기 위한 열심과 도덕, 적당한 통속과 적절한 가면증후군. 이런 세상에서 살 때는 정답을 찾기가 좀 쉬웠다. ‘보편적으로’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러나 여기서 벗어나면 일상은 곧바로 모험의 연속이다. 모르는 것 투성인데다, 답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생소한 것을 내가 아는 것에 두들겨 맞추지 않고,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머물러야 한다. 어쩌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투명한 상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어떤 무능력에서 이런 상태로 살기를 결정한 것일까. 이렇게 살아도 예속은 숙명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통속을 살기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고 그 길도 처음 가는 길인 것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맞든 맞지 않든 애매한 확신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늘 뭘 모르는 상태이다. 확신할 수가 없다. 진짜 모르겠다. 어찌 보면 감당의 문제이다. 뭘 모른다는 점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본 전제임을 알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당황하고, 불안해하며, 지금의 어설픈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 지금의 지평을 넘어설 방법은 지금은 이것 뿐이다. 나는 무엇을 모를까.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 아, 그런데 14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은 꿈일까 현실일까. 지금 나는 진짜 14년 후의 나일까 아닐까. 확신할 수 없다. 헐크의 핑거스냅이 필요하다.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