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스런 것들의 쌍스런 세상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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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호설性嗜好说, 풀이하면 성性의 기호嗜好에 대한 학설이다.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싶지만 그래도 조선의 대유大儒로 손꼽히는 다산의 말이다. 다산이 이런 신박한 조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서학西學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인간만이 영혼靈魂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다 보았다. 다산은 그의 논의를 빌어 인간의 성기호性嗜好란 바로 선에 대한 기호라 주장한다.

참 재미없는 주장이다. 그저 맹자의 성선설性善说을 다르게 말했을 뿐이다. 인간의 기호嗜好를 이리 단순히 말하다니. 잘 알려져 있듯, 다산은 천주학의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유가의 토양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확실히 오늘 교계의 여러 지도자들은 다산의 후예라 할 만하다. 그들은 성의 기호에 대해 그 누구보다 끊임없이 열심히 설파하되, 기호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의 지독히도 한결같다. 자고로 성의 기호란 이래야만 하오!

그리하여 저들의 성기호설은 순식간에 음양론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직 음과 양이 서로 합하여야만 한다며 결합과 화합과 조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음양론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식의 단순한 논리이다. 무릇 음과 양은 상호를 품고 있으며, 상호 침투하기도 하는데 저들의 음양론에는 그런 것은 전혀 없다. 오직 음과 양, 양과 음, 남녀의 교합만이 미쁘고 아름다울 뿐이다. 저들의 성기호설이란 오직 이성異性에 대한 열렬한 추구뿐이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이렇게 흰소리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테다. 문제는 양阳과 양의 결합에 대해 무서우리 만큼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항문에 대한 집착과 관심, 끊임없는 탐구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인체에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 입은 음식을 먹고 항문은 배설하는. 그런데, 항문에 성기를 삽입한다니!!(<지성과 이성의 만남>, 이재철&이어령) 저들이 지적하는 동성애의 비정상이란 이런 식이다. 여기에 하나를 첨가하면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과학적인 주장이 된다. 에이즈의 위험성.

이쯤 되면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은 논리의 위대한 비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실상을 중시하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지독하게 소박한 이해에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 바를 모른다. 그러니 한편으로 차별금지에 대해 ‘차별에 대한 자연적 권리’를 집요하게 옹호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지성과 이성이 참견할 수 없도록 하라. 용기는 무지无知와 무리无理에서 나온다. 차별 금지에 대한 ‘저항’이란 실상은 지성과 이성에 대한 저항이다. 옛날 마테오 리치가 영혼을 이야기했을 때, 영혼의 순수함 따위보다 영지灵知, 빼어난 앎의 능력을 이야기했다는 점은 끼어들 수도 없다.

동성애와 에이즈, 그리고 항문의 삼위일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경험을 유추해보면 적잖이 오래된 논법임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우리 고을에서는 되도 않는 말로 상대를 꺾을 때면 으레 똥을 무기로 들었다. 제 손에 똥을 묻히는 것도 방법이겠으나, 동무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그와 달랐다. 이렇게 툭 던지면 되었다. ‘그래 니 똥 굵다. ’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창의적인 반박도 가능하다. ‘니 똥 칼라파워’  

이 유구한 전통은 승리를 쟁취하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이쯤 되면 상대는 도무지 싸울 의지를 잃고 처연한 눈빛으로 등을 돌려버리곤 했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입을 더럽혀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법. 음란하고 쌍스런 말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는 비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싸움의 방식으로 음란함도 있으나 실상 이 음란이란 음탕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애性爱에 대한 집요한 관심, ‘어떻게’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며, 드러낸 것을 손가락질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다. 헌데 어째서 저들은 오로지 양阳과 양의 만남을, 남男과 남의 관계에만 집착하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기독교의 단성单性적인 특징 때문일 테다.

세상에는 성이 둘 있으면 동성애라는 것도 둘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들이 입에 올리는 것은 오롯이 남성의 문제이다. 여성 동성애란 논의 밖이며, 관심에도 없고, 상상 불가능하다. 오직 남성만이! 저 위로는 남성 하느님만이 있고, 아래로는 남성 목사들이 강단에 서 있는 까닭이다. 남성의 동성애란, 남성으로 대표되는 권력과, 지위를 뭉개뜨리는 위협이라 여기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묘하게도 동성애는 치유 ‘가능’하다면서 여성 성직자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말한다. 천 년이 지나도 이 말을 반복할 테다.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만 저토록 집요하게 아랫도리에서 문제를 시작하는 것은 아랫도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태초에 권력과 성직은 아랫도리에서 시작하노라. 그러니 저들의 음란이란 거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독점한 권력과 성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성, 성, 성! 말마다 성性을 입에 올리는 자들이 성직자의 음행에 눈을 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사가 신도를 성폭행했다고 할 때, 참으로 공정하게도 애써 성별을 표기할 이유 조차 없다. 뒷담화와 소문을 넘어 사실이 되고, 설사 법의 철퇴를 맞더라도 저들은 침묵한다. 목사의 아랫도리에서는 음행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작년 모교의 한 학우는 동성애와 페미니즘 강연을 열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한편 그 학우가 ‘폴리아모리’라는 성적지향을 가졌다며 조리돌림하고 있다. 정작 그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를 폭로하고 공론화하며 학내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정결한 동산에 ‘폴리아모리’ 따위가 들어올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남의 연애사건, 아랫도리 사정이건 별 관심이 없는 탓에 ‘폴리아모리’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찾아보니 ‘비독점적 다자연애’란다. 이 말이 맞다면 예수야말로 ‘폴리아모리’일 테다. 너도나도 예수를 신랑이라 말하니, 누군가를 독점하지 않으며 그가 신랑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이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성기호설性嗜好說을 통해 반추해 보건대 이러한 상상은 도무지 기호의 축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지난 8일 이 학우의 징계를 두고 재판이 열렸다. 듣자 하니 한 학생은 그 학우에게,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사랑(?) 가득한 편지를 건넸다 한다. 다른 재학생들은 학우를 징계하는데 앞선 교수들을 향해, ‘교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피켓을 들었다. 사랑이 넘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렇게 성性의 문제는 늘 사랑을 불러내니 얼마나 성性스러운 지. 

  • 참고 기사: 학생 성적 지향 폭로가 “공공의 이익 위한 것” (링크)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