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하는 잔소리를 생각하다①_비판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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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출간된 그의 책 『하류지향』이 한 때 많이 회자되는 듯했는데, 나는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의 저자로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자신의 완전 편파적인 팬심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이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요. 그런데 얼마 전 니체읽기 세미나를 함께 하는 한 분의 분노 섞인 일성이 들리는 겁니다. “어떻게 니체를 이딴 식으로 볼 수가 있어!” 그 분노의 원인은 타츠루의 또 다른 책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의 다음 몇 구절입니다.

니체는 ‘초인 도덕’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초인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추락하고 얼마나 우둔한가에 대해서만 불을 토하듯 웅변했습니다. 즉 ‘초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노예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비천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니체에게는 이 ‘바꿔치기’가 사고의 ‘지문指紋’이자 치명적인 결함인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말을 바꾸게’ 되면 결국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고양시킬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혐오를 불러일으켜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존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착적인 결론이 유도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혐오한 나머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열망하는 것을 ‘거리의 파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바로 ‘자기초극의 열정’을 제공해줍니다. 따라서 ‘초인’으로 향하려는 의지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추악한 ‘짐승의 무리’가 거기에 모여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주어야만 합니다. 자기의 ‘고상함’을 자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늘 참조 대상이 되는 ‘저급함’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지요.(59-60)

나는 타츠루의 저 의견에 완전히 수긍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니체의 글에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집으로 와서 한참 읽고 있던 니체의 『아침놀』을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며 다시 읽어보았지요. 타츠루의 해석대로 니체는 자신이 고양되기 위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대상을 필요로 하는 반응적인 인간이었던가? 그렇다면 니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노예’로 돌아간 게 아닌가? 니체에게 노예는 딱 그런 존재였습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를 의식하며 거기에 반응적으로만 행동하는 존재요. 

나는 『아침놀』의 문장들을 두 가지를 유의하며 읽었습니다. 니체는 ‘비판’을 어떤 식으로 하는가? 니체에게 ‘적’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떤 적인가? 왜냐하면 니체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타자를 비판한다면, 그가 비판하는 방식과 그가 상정하는 타자(적)를 찾아보면 될 테니까요.

니체가 비판하는 방식은 좀 어렵습니다. 분명 이것을 부정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것을 또 긍정합니다. 니체에게 부정과 긍정은 손바닥의 앞뒷면처럼 항상 붙어 다닙니다. 그래서 니체를 함께 읽는 우리들이 빠뜨리지 않고 한숨 섞어 하는 말이 있죠. “그래서,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이 한 마디가 니체의 비판이 여타의 비판과 다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니체의 글을 읽은 후 나에게 일어나는 ‘효과’를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어떤 주장하는 글을 읽고 나면 거기에 동의가 되거나 반발심이 일거나 합니다. 동의가 된다면 글쓴이와 같은 편이라는 것이고 그때 우리는 글 속에서 제시된(혹은 숨어있지만 다 알고 있는 그런) 상대를 함께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반발심이 든다면 나는 글쓴이의 반대편 즉 글 속의 적과 한편인 것이지요. 비판적인 글을 읽고 나면 이렇게 자연적으로 편가르기의 효과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니체의 비판적(부정적)이라는 글은 이런 편가르기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니체의 글을 읽고 나면 어느 편에 설 수 없어 오히려 안절부절 불안하게 됩니다. 좋은 쪽이 어딘지, 나쁜 쪽이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동조하기도 반대하기도 어려워지는 거지요. 니체의 비판은 여타의 비판적인 글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가 목적하는 바를 향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는 대상들을 비판한다는 타츠루의 해석은 유감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적을 상정하고 그 적을 비판하는 방식을 이름하여 ‘교정으로서의 비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옳음으로 적을 교정하고자하는 비판이지요. 니체의 방식은 이와는 다른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비판 개념은 고병권의 신간 『다시 자본을 읽자 1』의 부록에 실린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교정으로서의 비판’이 각자의 옳음을 주장하는 패싸움일 뿐이라면, ‘이행으로서의 비판’은 기존의 내 옮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옮음을 옳다고 할 근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비판입니다. 

비판은 기준을 긋는 문제입니다. 어디에 기준을 두는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게 돼지요. ‘이행으로서의 비판’은 다른 기준이 도래하도록 일단 기존의 기준을 흔드는 것입니다. 기존의 기준이 흔들리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옳을 수 없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 것이 더 이상 틀린 게 아니게 되겠지요. 이제 비판은 비판하는 자와 비판당하는 자 모두를 흔들게 됩니다. 니체의 독설들은 분명 독자를 흔듭니다.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기준은 해체되고 아직 세워지지 못한 기준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게 하는 게 니체의 글이 야기하는 효과입니다.    

사실 나는 비판에 관한 글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딸에게 하는 잔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일상에서 태도에 대한 것부터 딸의 생각에 대해 뭐라 뭐라 야단을 하는 나의 잔소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잔소리는 비판입니다. ‘교정으로서의 비판’이겠죠. 나의 옳음으로 딸을 재단하고 강요하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부터 나는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딸에게 뭔가 잔소리를 하려다가도 진짜 말 그대로 잔소리가 되겠지 하며 그만두는 일이 잦아진 겁니다. 결과로 우리 사이 분위기는 가벼워졌는데,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풀리지 않는 어떤 질문은 계속 올라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타인을 변화시킨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인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모녀는 무슨 말을 나눌 수 있는 거지? 그런 질문들요. 나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잔소리를 할 수가 없어 일단 침묵하는 중입니다. 혹은 “나도 모르겠어” 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