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짜리 우쭐함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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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후배로부터 나와의 만남이 본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놨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한 얘기였다. 몇 초간 우쭐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그 사실이 나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약 1초짜리 우쭐함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좋은 의미”라는 말 앞에는 꼭 “현재까지는”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새옹지마의 사례를 굳이 가져올 필요도 없다. “사랑해”라는 말에는 “지금은”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고, “넌 참 착하구나”라는 말에는 “내 말을 잘 듣는 한에서”라는 조건이 가려져 있다. 무엇을 말하든 발화상태에서의 상황과 조건에 한에서만 유효한 얘기라는 의미다. 미셸 푸코는 “지도와 달력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어떤 발언에 대한 조건과 한계를 명확히 설정했다.
그 상황, 그 장소, 그 시간의 정당성은 그 때만 유효할 뿐, 영원하지 않다는 것. 쉬운 것 같지만 자주, 쉽게 잊어버리는 부분이다. 옛날 옛적 그때 그 상황에서 나에게 던져진 어떤 안 좋은 말에 대해 오늘 갑자기 이불킥하게 되는 일도 종종 있지 않은가. 아주 사소한 한 마디였는데 나에게 와서 반복되는 동안에 거대한 괴물이 되어 나를 잡아먹어버리고 주변까지 황폐하게 만들어버린다. 상황과 조건은 사라지고 그 얘기만 동동 떠서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마치 나를 죽이기 위해 계획된 발언인 것처럼 점점 더 명확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칭찬의 말도 이런 식으로 거대해지면 종잡을 수 없다. 잘한 일, 옳은 일은 그 때 그 상황에서 적절했기 때문에 얻은 효과임에도 계속해서 그 효과의 덕을 보려고 한다. 만족감이 우쭐함으로, 우쭐함이 특별함으로, 특별함이 우수함으로, 우수함이 우월의식으로 점점 몸집을 불려간다. 우월함까지 가버리면 약도 없다. 주변엔 온통 나의 특별함을 모르는 사람들 뿐이고, 나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사람들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과거 한 때의 특별함을, 한번 뿐이었던 특별함을 삶 전체로 확대해 특별함을 번지르르하게 치장하고 다니게 된다. ‘나는 특별하다’는 착각으로 인해 이상적인 자아상을 설정하고 거기에 닿을 수 없는 매일의 자신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 허덕이게 된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하면 끝장난다!”는 류의 말을 자주 하면서.
가슴 속에 상처 한 조각 없는 사람 없듯이, 자기 안에 ‘우월이’ 한 마리 안 키우는 사람 없다. 경계해야 할 것은 관계가 역전되어 우월이가 나를 키우게 되는 상황이다. 우월이가 나를 지배해버리면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다. 도덕률까지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이 때 우월이는 타인을 비난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선한 피해자로 만든다. 하찮은 우월감을 쓰다듬고 있는 선한 피해자.
1초짜리 우쭐함만으로 족하다. 그 때 그 상황에서 적절한 말은 그 때 그 상황을 풍성하게 했던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모두 내 안의 ‘우월이’에게 하는 얘기다. 워워.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