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달라니, 롄수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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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을 보는 일은 즐겁다. 뭐 하나 명쾌하지 않은 세상에서 저리도 똑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말 할 수 있다니. 확실한 글을 쓰는 이는 부럽다. ‘이렇다’고 쓰려니 ‘저렇다’가 걸려서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니. 잊어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프다. 잊어달라는 말은 말하는 당사자가 아닌, 이 말을 들을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에. 나에겐 롄수가 그렇다.
죽음이 좋은 일이 되는 사람이 있다. 현세에서 살아봤자 별 수 없는 자가 사라져 주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어떤 이유에서든 좋은 일이 되는 죽음. 이런 죽음의 주인공은 평범한 일상에서 걸리적거리는 성가신 존재들이다.
소설 「고독자」에서 롄수는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통은 죽은 뒤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기억해주길 바라기 마련인데, 그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고 자신의 죽음에 울어주지 않기를 바라는 듯하다. 롄수는 자신을 도와주려 애써 준 선페이에게 편지에 이렇게 쓴다. ‘나를 잊어주시오. 나는 지금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
편지의 내용과 달리 그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홀로 죽음을 맞이했으며, 울어주는 이도 문상객도 없는 장례식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가 입고 있는 구겨지고 피 묻은 셔츠는 그의 죽음이 편안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한 것은 죽은 롄수의 표정이 숨을 쉬듯 편안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바람대로 되어서일까. 도대체 롄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 위선은 이제 그만
마을 사람들이 볼 때 롄수는 분명 이상한 부류였다. 그들은 롄수를 일러 ‘우리들과 다르다’고 했다. 롄수가 마을 사람들과 ‘다른’ 건 초등학교조차 없는 산간 마을에서 혼자 외지로 유학을 나갔다 온 사람이라는 것, 냉담한 듯 가정적인 듯 자신을 길러 준 할머니와 처자식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 이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괴상한 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롄수의 급작스런 눈물이다.
할머니의 시신이 입관될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가 갑자기 상처입은 이리처럼 울부짖었다. 그의 갑작스런 눈물은 돌아가신 할머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을 애도하는 눈물이었다. 자신이 할머니와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자신 역시 할머니와 같은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롄수에게 선페이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 스스로가 만든 고독 속에서 나올 필요가 있어요.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고독자들에게 흔히 하는 실수다. 너의 고독은 네가 만든 거야.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우리에게 롄수가 되묻는다. ‘내가 만들었다는 고독, 그런 고독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도대체 뭐가 긍정인가요.’
고독자에게 계보가 있다면, 롄수의 할머니가 1세대다.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와 소박당하고 평생을 바느질로 살며 롄수를 키웠던 할머니의 삶.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의 운명을 비웃었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할머니를 멸시했던 사람들은 할머니의 장례식에 와서 슬픈 얼굴을 하고 울었다. 살아있을 때는 멸시하고 죽으니 울어주는 사람들의 가식을 롄수는 차갑게 비웃는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그의 울음.
허식도 부정하고 누구의 시선도 상관하지 않은 롄수의 울음 안에는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말이 담겨있다. 언어화되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하나의 소리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의 외로움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짐승의 울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을 이해하기 싫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허식일지라도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와 다른 사람, 외부자가 된다. 롄수는 고독자 계보의 2세대다. 롄수의 고독은 스스로 고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1세대인 할머니의 고독과 같지만 다른 점은, 위선에 대응하는 그의 위악이다.
아, 위악도 이제 그만
“거실이 퍽 쓸쓸하군요….요즘은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어요?” “없어요. 그들은 내 심경이 편치 않으니 와도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심경이 좋지 않으면 사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거든. 겨울 공원에 가는 사람은 없잖소…”(중략) 그런데 그가 이때 귀를 기울여 뭔가를 듣고는 곧 땅콩을 한 움큼 쥐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문밖에서는 다량 등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가 나가자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쳤는데 모두 가버린 것 같았다. 그는 또 다시 그림자처럼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쥐고 갔던 땅콩을 종이 포장지에 내려놓았다. “이젠 내가 주는 것은 먹으려고 하지 않아.”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자조하듯 말했다. (『루쉰전집』 2. 「고독자」. 그린비. 326쪽 인용)
고독자라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고독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롄수 역시 사람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애들을 예뻐하며 주인 할머니를 공경한다. 그가 고독자가 되는 것은 ‘고독’으로 밖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롄수가 실직하자 사람들의 태도는 변한다. 항상 뭔가 토론하고 책을 읽으며 이마를 찌푸리고 담배를 피워대던 사람들도, 툭 하면 싸우고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던 주인집 다량같은 아이들도 더 이상 그를 찾지 않는다. 빈궁함이 극에 달아 책을 팔아서 연명하다 못해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선페이에게 할 때까지 형편은 말이 아니게 됐다.
“이삼십 원이라도 괜찮은데, 나는…나는…나는 아직 좀 더 살아야하니까…”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로 곤궁해져 예전의 침착함까지도 잃어갈 때 쯤 롄수는 군부대의 고문으로 자리를 얻었다. 혁명은 좌절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을 믿어주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반대편에 의해 살해되자. ‘신당’이었던 그는 이제 변절자가 되었다.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출세하자 사람들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이제 거실에는 “새로운 손님, 새로운 선물, 새로운 찬사, 새로운 아부, 새로운 절과 인사, 새로운 마작과 연회”가 넘쳐났다. 쌀쌀맞던 다량의 할머니도 그의 결혼을 걱정해주는 다정한 사람이 됐고 아이들도 다시 찾아와 떠들고 놀았다. 그런데 롄수는 이상해졌다. 주인 할머니인 다량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보자.
아시겠지만 웨이 대인이 운이 트이고 나서부터 사람이 예전과 달라졌어요. 전에는 나보고 벙어리처럼 노부인이라고 불렀던 거 알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늙은 할멈’이라고 불렀어요. 사람들이 그에게 약초를 보냈지만 그는 먹지 않고 마당에 내던져 버리고는…..아이들이 뭘 사달라고 하면 개 짖는 소리를 내라든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라든가 하면서… 그는 저축할 생각은 안 하고 돈을 물처럼 썼어요. 물건을 사더라도 오늘 산 것을 내일 죄다 팔아버리거나 부숴 버리니 정말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는 터무니없는 일만 하면서 실속 있는 일이라곤 조금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은 책, 340쪽 인용)
이게 다 뭔가. 세상 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변해버린 롄수의 위악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먹고 살기 어려워지고 자신을 믿어주던 마지막 한 사람이 살해되자 그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가치를 버리고 증오해왔던 것들을 받아들인다. 그럼으로 완전히 실패한 자가 된다.
새로운 손님과 새로운 선물로 북적이던 마작과 연회가 끝난 밤이면 그는 혼자서 각혈을 하고 경멸과 혐오로 잠 못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는 죽는다. 피 묻은 셔츠는 그가 증오해 마지않던 군복으로 갈아입혀졌다. 변하지 않은 건 여전한 그의 편안한 표정뿐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검은 얼굴 속에서 두 눈만이 빛을 발하고 있던 롄수의 모습을 선페이는 또렷이 기억한다. 죽기 사흘 전 목이 막혀 말도 못하는 상태로, 확고하게 빛나던 두 눈의 롄수는 빛을 잃고 고개를, 툭 꺾는다. 마지막 유언조차 남길 수 없는 절대 고독 안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돈 크라이 포 미
타인과 자신의 위선을 미워했기에 위악으로 살았던 롄수의 삶과 죽음. 관 속 롄수의 차가운 미소는 군복을 입고 누워있는 우스꽝스러운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의였다. 선페이가 그의 장례식을 차마 다 못 보고 나올 때, 그의 귓속에서는 발버둥치며 나오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롄수가 울었던 이리의 울부짖음이었다. 고독을 씹어 삼키는 사람들을 위해 롄수가 울었던 그 울음이 다시 선페이의 귓가에 들려왔다.
자신의 바람대로 롄수는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도 진심으로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았다. 선페이도 그를 위해 울지 않았다. 고독자의 계보는 3세대인 선페이에게 와서 그 성격을 달리한다. 고독자의 운명은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의 죽음은 더 이상 눈물로 기억되지 않는다. 롄수의 울음은 롄수에게서 끝난다.
귓속에서 울부짖던 그 울음이 마침내 빠져나온다. 선페이는 한순간 롄수를 이해했다. 달빛은 쏟아지고 관 뚜껑에 못 치는 소리 요란한데, 선페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는 위선도 위악도 아닌 다른 고독자의 길을 좀 더 가볍게 걸어갈 것이다.
고독의 깊이만큼 치열했던 롄수의 죽음은 삶이 되어 우리를 고독자로 여전히 살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롄수의 위악은 아름답다. 롄수의 죽음은 우리를 살게 하고 롄수의 실패는 오히려 승리다. 철저한 죽음으로 철저히 산 자의 철저한 실패.
삶은 똑똑한 말로, 명확한 글로, 강한 주장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묻고 싶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격려는 흔히 말하듯 꼭 그렇게 서정적이고 긍정적으로만 드러나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실패로, 위악으로, 죽음으로 이렇게나 아직은 좀 더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것, 냉소도 비관도 아닌 루쉰의 방식이다. 이게 루쉰이다.
2019. 9. 29. 해방촌에서 미미 씀.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