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병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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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라는 질문이 있다. 자주 대면하게 되는 질문이다.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주 묻는다. 이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기존의 닳고 닳은 의미부여에 대한 답일 뿐인데도 계속 묻게 된다. 이익이 있는가, 발전적인가, 교훈이 되는가 등 의미부여는 묘하게도 발전주의적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재미있는가, 아름다운가, 타인을 돕는가 등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의미부여도 있지만 결국은 유의미 속에 들어가 있다. 의미없음의 자리는 늘 가치없고, 부끄럽고, 초라하고, 돈 안 되는 허공이다. 지금껏 답습해 온 의미부여로는 내 삶을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에도 계속 이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운명인 걸까. 의미부여의 언어도단에 부딪혔다.
오늘의 물음은 이것이다. 의미부여의 끝 혹은 의미없음은 삶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걸까. “그 의미, 나랑 상관없어요.”, “그건 나에게 의미없어요”가 아니라 “삶이 통째로 의미없어도 잘 살아요”는 과연 가능한지 묻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믿어 의심치 않던 지반이 통째로 허상이었음을 알았을 때, 다른 지반을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지반없이, 지반없음에서 그 상태로 사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근거가 다 거짓이었다고 누군가 그렇게 외쳤는데도 “그렇다면 어딘가에 옳은 답이 있을 거야”라고 가르치는 누군가들의 가면놀이에 계속 장단을 맞춰야 할까.
현대인은 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가 금방 휘발되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 내 가족, 내 친구, 내 조직, 내 민족, 내 물건, 내 경력, 내 팔과 다리, 내 오장육보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의미부여로 삶이 틈 없이 빡빡하게 지속되다가, 결국 내 것이길 원하지 않았던 ‘내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무 생각 못하지 않을까. 모든 순간이 의미있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의미가 ‘의미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일까.
물론 ‘내 죽음’은 순간이 아니라 또 지속적인 의미를 이미 만들어낸다. 내 장례식, 내 무덤, 내 후손, 내 이름, 내 업적, 내 이야기, 나, 이토록 힘들고 외롭고 멋지거나 찬란한 삶을 살았던 내가 이 세상에는 없지만 계속 사람들 사이에서 남아있고 회자되고 기억되고 칭송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바라는 꽃같은 ‘나’가 살아있기를 바라마지 않으면서 말이다. 휘발되어버려야 할 순간에도 휘발되지 못하고 지상의 한 구석에 그토록 자기 자리를 마련해야 직성이 풀리는 병. 의미부여의 병이 불치의 불사조가 되어 생을 휘어잡고 있다.
사실 그저 휘발되는 존재로 있다 가는 건 그렇게 못 참을 일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멍 때리기조차 대회를 개최하여 챔피언을 뽑아야 하는 이런 세상에서, 모든 게 의미없는 한 차례의 멍 때리기라고 강변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개성있는 주장이라고 의미부여되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귀하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분석해 보시오’라는 요구가 따라붙을지 모른다. ‘의미’라는 단어를 창조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을 위해 우선 순위를 나누어야 했던 최초의 누군가들은 의미가 이토록 끊임없이 세포분열되는 세상을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의미’라는 단어를, ‘의미’라는 의미를 멸종시킬 최후의 누군가들은 의미없는 세상에서도 의미없이 살다가는 것에 의미부여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원없이 아무 의미없는 나로 있어보는 순간이 있는지 자주 묻게 된다. 이건 아니지, 그것도 아니야! 하면서 제 의미가 있는 줄 알고 살아오다 의미의 독과점 현실을 알고 나서야 “모든 게 의미없다”며 어깃장을 놓는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세상이 닳도록 의미부여해온 그대로의 방식으로는 돌아갈 수 없기에. ‘의미없는 나’가 또 다른 의미부여의 연장일지언정, 지금은 의미없음으로 존재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푸코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렇게, 이런 식으로, 그들에 의해, 이러한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받지 않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연습이다. 물론 아직은 의미없음이라는 우산을 함께 쓸 누군가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