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나의 익명성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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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공유자전거 따릉이가 나름 쓸 만하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이십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자전거를 타고 가 보았다. 바로 한강이다. 강바람 맞으며 먹는 즉석라면의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 어스름 개늑시의 시간에 만나는 한강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이걸 안 보고 살아왔다니 헛살았다 싶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혼자 만끽할 수 있는 광경과 시간이어서 더욱 좋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고, 산책하러 나온 사람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저 바람이고 나무이고 자연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따질 필요도 없이 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서울의 내밀한 바깥을 구경하는 맛. 후룩후룩 혼자만의 자유란 것을 불어 넘기는 맛. 우주 차원의 익명성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은 그런 기분.

그 날도 어김없이 속으로 좋다, 좋다, 좋다를 연발하며 즉석라면을 들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순간, “팀장님?”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정할 수 없이 나를 향하는 목소리였다. 그 짧은 찰나에 나를 팀장으로 부를 만한 인간리스트들이 후루룩 지나갔다. 그동안 직위는 왜 그토록 많았었는지, 그 시절 팀장으로 불렸으니 그에게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팀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제발 승진 좀 시켜달라는 말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예전에 담당하던 매거진 클라이언트였다. 이름이(직함이었지만) 불러져버린 그 순간 소중한 나의 익명성이 쨍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이름이 불려서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시도 남겼다는데, 이름이 불려진다의 것의 해악도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체로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발가벗겨진 기분인지, 어쨌거나 그 날 내 자유의 즉석라면은 불어 터지고 말았다.

“팀장님 자전거 타시나 봐요? 우리 가끔 한강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아, 네 좋죠, 좋죠!”

한강적 분위기에 운율을 맞추고, 숙련된 사회성이 박자를 맞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시 조용해진 서울 우주를 맞이했다. 그 날은 좀 씁쓸했다. 숨고 숨어 겨우 찾아낸 듯한 소중한 비밀기지를 발각당한 기분. 이름도 없이 형상도 없이 있을 수 있는 시간당 천원 짜리 운둔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하는 기분. 드러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한 선생님의 얘기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어디 외국으로 숨어들어야 되나?

“카톡왔어~”

가장 우울한 목소리로 지정해 놓은 메시지 알림이 들어왔다. 오늘 만나서 너무 반가웠다고, 그렇게 가까이 사는 줄 몰랐는데, 이제 자주 얼굴보자고. 나도 좋다. 당시 일할 때도 손발이 척척 맞아 함께 일하는 게 너무 재밌었던 분이다. 한 달 벌어 세 달은 살아야 하는 나같은 프라랜서에겐 문어발식 인간관계가 돈으로 연결되는 징검다리, 분명 고속도로는 아닌 징검다리임을 알고 있기에 그 분이 나를 찾아주는 것은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뼛속까지 익명성을 추구하면서도 유명(有名, 이름 있음)한 삶을 살아야 되는 처지에 놓인 생계형 프리랜서는 상냥한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날려주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구든 대체 가능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은 일의 능력 외에도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 법이다.

언제쯤이면 마음껏 익명 속에서 살 수 있을지, 어쩌면 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익명하지 못하고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탄탄한 익명을 득하게 되면 여유롭게 이름불리는 상황을 일부러 찾아다니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익명에 갈급하다. 닳고 닳아서 토해낼 것도 없는 속 빈 상태에 뭐라도 채워 넣어야 또 이름이 불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시간 당 천원짜리 따릉이를 타고 강바람을 맞으며 즉석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고작 가진 재주가 이름이 팔려야 생활비를 건질 수 있는 나는 오늘도 익명을 위해 유명을 산다.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