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과 짜릿함의 역설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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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평온하던 주인공의 일상이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한다. 평범하고 무해한 주인공에게 부당한 일이 발생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악역)까지 등장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주인공은 온갖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선하고 정의로운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하며, 빌런은 갈수록 악랄함을 증폭시켜야 한다. 주인공이 견디다 못해 잠시 흑화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론으로 가기 위한 보조장치일 뿐이다. 왜 그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빌런은 갑자기 결정적인 장면에서 아주 뻔한 실수를 하거나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푼다. 주인공은 시작할 때보다는 약간 더 행복한 상태가 되거나 신분이 상승된 상태로 엔딩을 맞는다.

물론 최근에는 변종들이 등장했다. 악역의 숨겨진 인생사가 시청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하고, 주인공과 악역이 극적인 전투 끝에 함께 죽음을 맞기도 한다. 권선징악 해피엔딩만큼 극적 부딪힘과 공동의 파멸도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지구를 그 따위로 지킬 요량이면 그냥 날려버리는 게 더 통쾌한 결론인 것이다. 꿈도 희망도 필요없다. 다 망해버려라.

해피엔딩이든 종말이든, 중요한 것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극적 공식이다. 위기가 진짜 위기같으려면, 절정이 정말 숨 막히는 절정이 되려면 갈등은 송곳처럼 첨예해야 하고, 고난은 넘치도록 처절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카타르시스를 위해.

갈등과 고난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쾌감이 오는 것이지 갈등과 고난없이는 쾌감을 맞이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토록 울어대는 것이고, 시작부터 주인공은 그렇게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최근 시작한 대작 드라마가 구설수에 오른 이유도 틀에 박힌 인물구조와 상투적인 전개 때문이었다. 이제 웬만한 고난 가지고는 간접경험이 차고 넘치는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시청자들을 가슴 졸이게 하고, 안타깝게 하고, 울분에 휩싸이게 하지 않으면 작가는 금방 교체되고 만다. 시청자들은 최고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해 극도의 긴장과 갈등과 분노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드라마 이야기일 뿐인데, 어쩐지 극적 전개를 원하는 것이 드라마 속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삶에는 늘 빌런이 존재한다. 나를 괴롭히고 험담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늘 있다. 일면식이 없는 사람조차 얌전히 살아가고 있는 나를 조롱하고 억압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빌런이 가족일 때는 인생 그 자체가 극강의 갈등 상태다. 가족 중 한 명은 분명 나와 가족 전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빌런이다. 우리 가족 중에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빌런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본인이 모든 이들의 빌런인 줄 모르는 빌런들이 수두룩하다. 어쨌든 우리는 본인들이 설정한 빌런들과 갈등과 역경을 주고 받으며 매일의 드라마를 쓰고 있는 중이다.

설령 뚜렷한 빌런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고난과 갈등을 필수품인 것처럼 지고 다닌다. 고민이 하나도 없거나 걱정거리가 없으면 왠지 허전한 기분,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걱정과 고민에 익숙해져 있다. 아무 일 없이 분명 여유롭고 쾌적한데도 불구하고 뭔가 끌어올 걱정거리가 없는지, 새로 직조할 빌런은 없는지 탐색한다. 걱정 중독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금단현상이다. 이 걱정만 사라지면 행복이 짠하고 등장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금방 다른 걱정으로 배가 채워진다. 현재의 걱정과 고민이 없으면 과거와 미래의 것까지 기어코 끌어와야 한다.

어찌 어찌 하여 위기와 절정을 통과한 드라마는 빠르게 결론을 맺는다. 주인공이 빌런과의 대결에서 승리해서 해피엔딩을 맞이했다면 그걸로 끝이다. 해피를 오래 보여주면 시청자는 지루하다. 길고 긴 위기와 절정 끝에 맞이하는 아주 짧은 결론. 흡사 연인들의 정사를 연상케 하는 흐름이다. 왕자님과 공주님이 과연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행복한 일상은 아무런 쾌감도 주지 않는다. 고난 없는 행복은 왠지 진짜 행복이 아닌 것 같고, 갈등 없는 관계는 뭔가 밋밋해서 견딜 수 없다. 정말 해피를 원했던 것일까. 진짜로 원하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주는 빌런의 존재와 갈등의 연속 아닐까. 절정과 빌런없이 발단, 전개, 전개 또 전개로 이어지는 삶을 열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글쎄, 아직까지 만나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드라마 속의 밋밋한 설정과 구조를 견디지 못하면 시청자 게시판에 불을 내지만, 현실이 밋밋할 때 우리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쓰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이때 자신은 언제나 선하고 정의롭고, 늘 피해자이기만 한 주인공이다. 누군가를 빌런으로 고정시키고, 투쟁해야 할 대상을 만들고, 위험한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어 계발시키고, 노력이 필요한 뭔가를 설정해서 기꺼이 탐닉한다. 잠시라도 밋밋하고 지루하면 안 된다. 매일이 스릴과 쾌감의 연속이어야 한다. 과연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맞는 걸까? 카타르시스를 위해 사는 건 아닐까? 오늘도 매일의 무난함과 긴장없는 일상의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서 뭔가 일을 벌이고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고민거리를 만들었을 게 분명하다. 무엇을 위해? 기약은 없지만 분명 오게 될 아주 짧은, 카타르시스를 위해.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

1 thought on “지루함과 짜릿함의 역설”

  1. 행복이란 단연코 카타르시스지요! ^^

    카타르시스의 순간성, 절정감 등을 위해선 반드시 위기가 필요합니다. 위기는 탐닉되지요. 그리하야 밋밋한 드라마는 죄악입니당. 시청자 게시판에 위기를 위기를…하다가 해피를 해피를… 하며 좀비들이 달라붙는 것을 이해할 수 있네요. 일상이 너무 밋밋해서 인지, 위기가 일상처럼 지속되서 위기가 밋밋해진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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