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엔딩 2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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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들

죽음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경박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너무도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겁게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 감정은,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슬픔이다. 내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남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슬픔, 이 두 가지를 감당하기 힘들기에 죽음은 그토록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몇 마디 말을 남기고 싶은 것은 죽음을 좀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대학교 때, 친구의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우리가 2학년이었으니 연년생인 동생은 스무살이었겠다. 비통한 표정으로 친구의 집을 들어서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파티를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 장례식이 아니라, 장례파티다.

곡소리 대신 생전의 동생이 좋아하던 팝음악이 흘러나오고 동생 친구들이 상주인 어머니와 내 친구와 조용하지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친구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이 좋아하던 음악과 음식이니 많이 먹으라며, 슬퍼하는 건 둘째 아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며.

40대의 내가 보게 된 어느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80세 가량의 이탈리아 노인이었는데 그는 생의 마지막 파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화면 속의 그는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파티를 하고 마지막 담배 한 가피를 맛나게 피운 후, 주사를 맞고 안락사를 했더랬다.

중년이 된 나는 전보다 부쩍 죽음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앞의 두 번의 경험을 할 때보다 더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뉴스나 책에 나오는 무수한 죽음들 앞에서 무감각해지는 것은 그것이 남 일이라 그렇다. 죽음이 내 일이라면 어떻게든 살려고 수없이 변절하고 온갖 명약들을 다 찾아다닐 거다.

이토록 소중한 나의 죽음. 이렇게 말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아무리 관계의 중요성을 운운해도 너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털끝하나 중요하지 않다. 나의 죽음에 대한 감각을 다르게 하지 않으면 남의 죽음에 대한 감각도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이것은 무감각에 대한 문제 제기다.

 

죽는 것은 처음이라

  1. 상을 치를 때, 누구에게서건 돈 한 푼 받지 말라.-다만 친한 벗의 것은 예외다.
  2. 나를 잊고 제 일을 돌보라.-그러지 않는다면 진짜 바보다.
  3. 아이가 자라서 재능이 없으면 작은 일로 생계를 꾸리도록 하라. 절대로 허울뿐인 문학가-예술가 노릇은 하지 말라.
  4. 남의 이빨과 눈을 망가뜨려 놓고서 보복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

자기 죽음을 맞이한 루쉰의 유언장의 일부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죽는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집에 돌아와 누워 생각해본 상상의 유언장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유언장의 실재 여부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다.

이 유언장은 흥미롭다. 따스하고 또 차갑기 때문이다. 혁명가이자 문학가 이전에 사랑하는 어린 아들과 아내를 두고 떠나야 하는 가장의 현실적인 걱정들인 돈 문제, 아이의 장래 문제 같이 자신이 죽은 뒤 아무쪼록 잘 살아가길 바라는 루쉰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기에 마음 한 쪽 구석이 뜨거워진다.

진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따스함 너머에 있는 자기 죽음에 대한 차가움이다. 이러한 차가움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유언장 그 어디에도 죽음에 대한 비장함이 없다. 평생을 혁명과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중국을 생각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것이다. 나는 이렇게 죽으니 후대가 나머지를 도모해달라는 둥, 아이는 뜻을 받들어 중국의 기둥이 되라는 둥, 모든 사람들과 화합하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둥둥. 우리가 상상하는 죽기 전의 흔한 언사들이 그에게는 없다.

이 글의 마지막은 덤덤하다 못해 무색하다. 열 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이런 의식은 없었다. 유언장도 쓰지 않았다. 말없이 누워 있었을 뿐이다. 때론 훨씬 절박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는 순간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서 한번뿐이니 어떻게든 견뎌내겠지…..나중에 좀 호전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이런 것들은 아마, 정말 죽기 직전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정말 죽을 때에는 이런 상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할까는, 나도 모른다. (『차개정잡문 말편』, 「죽음」, 그린비, 776쪽 인용)

루쉰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죽음 직전에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올까는. 아직 죽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자질구레한 일을 생각할 뿐이다. 유언장도 썼다가, 누군가를 죽어도 용서하지 않았다가, 살아서 한번뿐이니 어떻게든 견딜 것이라 생각하다가, 죽는 것은 처음이라 도대체 어떨지는 나도 모르는 것으로 끝나는.

 

하지만 이런 엔딩

인생은 참혹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뭘 어떻게 할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으로 끝나기에. 하지만 이런 엔딩에는 아름다운 위선이 아닌, 참혹하지만 진실한 죽음의 윤리가 있다. 우리가 감각하는 보통의 죽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윤리. 그것은 죽음의 통념을 넘어 죽음을 다르게 감각하는 것이다. 죽음을 다르게 감각한다는 것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의 정서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죽음을 두려움과 슬픔으로만 감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루쉰의 마지막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친구 어머니의 장례파티, 안락사한 이탈리아인의 경우와 같은 죽음의 윤리적 행위들에 대해. 자식의 죽음, 나의 죽음, 나아가 남의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그들 각각의 다른 감각들에 대해.

이것은 인간에 대한 다른 감각에서 시작된다. 나의 죽음 앞에서 두렵고 남의 죽음 앞에서 슬픈 정서 너머에 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보는 시선. 이것이 루쉰의 인간인 ‘생물학적 인간’이다. 생물학적 인간의 요지는,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꿔보면 인간은 어떻게든 죽는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은 ‘인간’이라는 진리에서 비롯된다. 모름지기 인간의 죽음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은 죽음마저도 인간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끈질기게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인간적인 삶을 끈질기게 욕망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는 고귀한 통념은 죽음까지도 비장하고 순수한 죽음에 대한 통념으로 마지막까지 시달리게 만든다. 분하다. 죽는 순간까지 ‘인간’이라는 진리를 놓지 못하고 죽는다면, 아니, 놓지 못하고 산다면.

자신을 생물학적 인간으로 보는 자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몸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정서라는 감정과 신체라는 물질이 구현되는 장소로서의 몸, 그것의 죽음. 생물학적 인간의 죽음은 이런 것이다. 죽음을 무감각하게 겪는 게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겪는 것.

우리의 통념을 벗어나는 루쉰의 무덤덤하다시피한 그의 죽음 앞의 태도. 그것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이런 차가움이다. 동시에 이런 뜨거움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오히려 인간에 대한.

2019. 5. 21.
해방촌에서 미미 씀.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