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하겠네”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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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차 휴가 날 뭘 할까, 묻는 남편에게 미술관에 가자 했다. 갑자기 왜? 하는 표정이길래 그냥 그림이 자주 보고 싶어진다 했다. 썩 내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일 아침 딸의 등교 후, 어서 가자 10시에 오픈이야 한다. 호감 겨우 10프로의 표정까지 숨길 재간은 없으나 내 입에서 떨어진 말에 남편은 웬만하면 맞추는 사람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었다. 알았대도 달라질 것은 없었으나 누구의 어떤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였다. 관람비가 4천원으로 쌌고, 7개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회화를 보고 싶었다. 아니 회화를 보는 나를 보고 싶었다가 맞겠다.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덴마크 작가 아스거 욘과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 수식된 박서보의 작품들이 있었다.
그림을 보고 뭐라도 떠올려지는 게 있으면 빨리 지나쳤다. 내게 떠올려진 것이 사실에,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는 상관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림 앞에서 오히려 오래 지체했다. 가까이 다가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다가가서는 붓질이 담고 있는 방향과 힘을 관찰했고, 그것이 편편한 이미지로 보이게 되는 거리까지 뒤로 한걸음씩 물러섰다.
가까이 가면 사람을 볼 수 있다. 떨어지면 인구 속의 한 점이 된다. 사회운동가라거나 수행자라거나 하는, 작가 앞에 붙은 수식어가 정작 그림 앞에서는 무색해진다. ‘멀리서, 결과적으로,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늠할 때나 붙여질 말이라 그렇다. 가까이 가면 그저 숨을 고르며 붓질을 반복하는 작가의 노동이 느껴질 뿐이다.
미술관에서의 두 시간은, 운동하느라 걷는 두 시간보다 피곤하다. 리듬감 있는 걷기에서는 다음 걸음의 보폭과 시간이 몸의 예측에서 빗나가지 않는 지라 몸에게 수월하다. 그에 반해 미술관에서의 걷기는 몸이 자신의 동작을 예측할 수 없다. 그림과 그림사이는 터덜터덜, 그림 앞에서 멈춤,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에서는 다시 빠른 걸음으로, 몸이 헤롱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단 케이크와 쓴 커피가 필요한 시간, 안 나오길 바랐는데, 남편 입에서 결국 그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나도 그리겠네!”
나는 165*260cm의 대형 캔버스를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정확히 의도된 굵기의 빗금을 채울 수 없다. 캔버스의 한 귀퉁이를 채우려다 뻗어버릴 게 틀림없다. 어찌어찌 진행된다 하여도 머릿속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라며 의미 없음을 그만두는 정당화로 삼을 게 틀림없다.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빗금으로 또는 가로줄이나 세로줄로 가득 차있다. 거리를 두고 획 쳐다볼 때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 금들과 금들이 만드는 일정한 간격은 박서보 자신에 의해 정확히 통제되고 있는 팔 근육과 손목의 스냅을 담고 있다. 연필을 잡고 빗금을 칠 때 그의 손끝은 손목에서 팔, 온 몸의 신경과 근육으로 이어지는 정확한 힘 조절을 통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 아마 호흡마저도 조절될 거다. 박서보는 이런 걸 평생 했더라.
이걸! 나는, 나도 할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없다.
강렬한 색채에 굵은 붓자국의 힘이 느껴지는 아스거 욘의 회화는, 그렇다, 형태를 정확히 재현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마구 덧칠해놓은 낙서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캔버스를, 아니 캔버스 하나를 왼쪽 위 귀퉁이에서부터 오른쪽 아래 귀퉁이까지 빼곡히 일단 낙서로도 채울 수 없다.
좋아하는 색깔을 써서 처발처발 하다가 그만두고 싶을 때 중단한 결과물, 예컨대 아이들의 그것은 예술 작품과 구분된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 화가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료와 도구에 대한 독특한 자기 판단을 가지고 있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좀 더 근접하기 위해 형과 색을 만들어내고, 혹은 파괴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글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것에 좀 더 근접할 만한 형용사와 접속사를 고르고 혹은 탈락시키고, 보통 명사를 쓸지, 대명사로 대신할지, 종결어미를 무엇으로 할지를 고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로든 그림으로든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 그 자체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하기를 멈추지 않기에 작가다. 예술 작품과 아이들의 낙서는 그렇게 구분된다.
여기에, 작가라서 할 수 있는 하나가 또 있다. 아니 반대로 그 하나를 하기에 작가가 된다. 그것은 ‘그만’, ‘여기까지’ 라는 판단이다.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호흡부터 근육까지 단련하고, 색채와 도구에 대한 섬세한 선택과 이용을 통해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다 하자. 아무리 오래, 덧칠에 덧칠을 해도 표현하고자 하는 바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한계가 그리는 자 자신에게 있다.
오늘, 자기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한 사람만이 ‘그만’이라는 판단을 한다. 그리고 거기까지의 결과물이 작품이고 그는 작가가 된다. 어린애 장난같이 보일 그림 안에 오늘 이 시간까지의 노력과 자기 한계에 대한 자각과 용기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나는, 이걸 나도 할 수 있겠네, 라고 말할 수 없다.
먹은 게 내려가다 얹혔을지 모르겠다. 의도하지는 않았던 내 일장 연설에.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