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개를 다오!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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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과 개가 중요하다

요즘 마오의 평전을 읽고 있다. 루쉰에 대한 관심에서 어쩌다보니 마오와 공산당의 역사까지 읽게 된 것이다. 마오 개인의 역사는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읽다보니 드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인지, 오늘 눈에 들어오는 루쉰의 글은 이런 거다.

대략 2천 년 전에 류선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각고의 노력 끝에 신선이 되어, 부인과 같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올라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그녀는 살던 집이며 기르던 닭과 개를 두고 가기가 아쉬웠던 것이다. 류선생은 상제에게 애원을 하여 집과 닭, 개 그리고 그들 부부를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강구하고 나서야 겨우 신선이 되었다. (『차개정잡문』, 「중국 문단의 망령」, 그린비, 212쪽 인용)

복잡하기로 유명한 중국 근현대사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의 체질 개선을 위해 공산당과 손잡았던 쑨원이 죽자, 장개석이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반공세력들을 움직여 국민당 내의 공산당을 몰아내려는 마음을 먹는다. 이로 인해 1927년, 중국의 앞날을 위해 손잡았던 1차 국공합작은 결렬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국민당 세력은 국공합작의 노선에서 공산당 토벌로 자신들의 노선을 전향했다. 국공합작을 이끌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국민당은 공산당을 ‘토벌’하게 되었나?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기심, 즉 개인적 삶의 질 향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당과 손을 잡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의 문제가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공산당의 이념 같은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다해도 자신들이 기르던 닭과 개의 숫자가 줄어드는 공산화는 원하지 않았던 것. 그렇게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이해와 득실을 계산한 끝에 나온 것이 ‘합작에서 토벌로’의 전환이었다. 더 이상 공산주의가 거론되거나 그 싹이 다시 트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답은 당연히 토벌이었다.

 

나는 절대로 공산당이 아니에요

토벌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어떤 토벌이든 토벌은, 토벌 그 자체가 이유다. 토벌의 이유가 닭과 개가 노니는 앞마당에 대한 것이었기에 공산당에 대한 적의는 싸움의 이유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념 대신 다른 명분이 필요해진다. 공산당에 대한 적의가 이유가 아니라면, 막연한 적대적 감정으로 뒤덮이고 가려지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래서 토벌은 더욱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분노와 갈등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공산당에 대한 식별은 참으로 쉬웠다. 상대방이 공산당인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없다. 그냥 ‘아무개는 공산당이다’를 외치면 된다. 상대를 공산당으로 신고함으로, 자신의 ‘공산당 아님’이 증명되는 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툼과 분쟁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팩트나 진실이 아니다. 싸운 사람 중에 누가 공산당인가에 달려 있게 된다. 공산당에 가입했던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있었다. 세상이 바뀐 지도 모르고 소련 유학에서 돌아온, 공산당의 교수대에 매달려 죽은 친구의 다리를 잡아당김으로써 ‘참회’는 증명되었다.

 

문학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세상이 이 지경이라 그런지 문학가들 중 제정신이 아닌 그룹이 등장한다. 루쉰은 1934년 마스터 와타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들은 “초당파적인 듯 보이나 사실은 우파”라 말했다. 언뜻, 초당파적이라는 말은 나이스하게 들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러니까 좌도 우도 아닌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제스츄어는 그럴 듯하다.

루쉰은 제정신 아닌 문학가 그룹을 ‘제 3종인’이라 했는데, 제 3종인의 말은 이렇다. ‘문학은 쥐뿔도 모르면서 문학을 훼손하는 좌익비평가 놈들~’ 루쉰의 말은 이렇다. 지들 문학의 수호자들이 국민당 정권이라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 철학자들과 제 3종인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듯 보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것과 저것 너머로 가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전제를 깨기 위한 것이지만, 제 3종인의 초당파적이거나 초월적인 태도는 권력자에게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점, 권력자에 맞춰서 뭘 얻는가? 닭과 개다.

권력자의 특성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특정한 방식의 말들을 하게 만들고 그것이 검은 연기처럼 스며들며 민중들을 교란시킨다. 이것과 저것 너머에 계신 제 3종인은 “죽음의 설교자”다. 왜냐하면 현재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당이 벌이고 있는 짓을 외면하고 그것을 폭로하는 혁명 문학가들을 지탄하면서 자신들이 말하는 것은 문학의 순수성이다. 정치와는 상관없다는 문학의 순수성을 빌미로 그들은 순수한 글을 쓰고, 국민당은 그들의 순수한 문학을 후원하는 커넥팅.

그러나, 문학은 어떤 형식을 취하든 현재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일을 바로 보는 것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현재의 일은 지금 일어난 일, 시사(時事)다. 현재와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쓰는 것. 이 시대 루쉰에게 문학은 이런 것이어야 했다. 뒤이어 루쉰의 현재에,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독자에게는 그저 간행물이 생기가 없고 작품이 시원찮으며 늘 진보적이었던 유명 작가가 올해 갑자기 모자란 소리를 하는 이로 변한 것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문학계의 전선은 오히려 더 명료해졌다. 기만은 오래가지 않는다. 뒤이어 올 것은 또 한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일 것이다. (같은 책, 212쪽 인용)

권력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말을 퍼뜨리는 방식이 안 먹히면 직접 치는 방법밖에 없다. 판금과 검열. 익숙한 단어다. 길을 가다 재수 없게 걸린 가방 검사까지도. 불과 몇 십 년 전 일이다. 갑자기 신문에 검은 자국이 가득하고 문인들이 ‘어버버’ 벙어리 흉내를 내던 시절 거리의 어두운 얼굴들 얼굴들.

 

닭과 개를 다오! 무조건!

여기까지 쓰다 보니 맥 빠진다.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 정책이라는 한바탕의 피 냄새에는 어이없게도 온통 ‘허상’ 뿐이다. 여기에는 다수의 피 냄새가 섞여 있다. 권력을 지키고 싶은, 권력자가 되고 싶은, 이 기회에 한판 땡기고 싶은 혹은, 다른 건 필요 없고 그저 자기 몫의 닭과 개를 소소히 늘리고 싶은 다수의 욕망이 뒤섞인 피 냄새.

루쉰은 이 글의 제목을 ‘중국 문단의 망령’이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만의 일일까. 망령의 무서운 점은 이것이 진실보다 더한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이 결국 이기적 소유욕인 닭과 개의 개체수 증가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것. 내가 먹어야겠다고 더 가져야겠다고 벌이는….

사는 데는 닭과 개가 중요하다. 닭과 개 때문에 사형당한 친구의 다리를 잡아당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살아야하니까. 하지만, 본심은 닭과 개에 대한 이기심이면서 고매한 대의명분으로 기만하는 것이라면.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면.

루쉰은 이 땅의 수많은 ‘류선생’에게 묻는다. 혹시 우리는 우리의 커튼 뒤에서 무엇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닭과 개를 다오’에서 우리는 예외인가. 국민당이 나빴다면 공산당은 예외인가. 혁명 문학가는 예외인가. 아니, 혁명은 예외인가. 나는? 너는? 또 우리는?

                                                     2019. 8. 18. 해방촌에서 미미 씀.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