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줍’의 묘미猫美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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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줍’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냥줍’은 고양이 울음소리를 귀엽게 표현한 단어에 ‘줍다’라는 단어를 붙인 말이다. 뜻은 ‘길에서 고양이를 줍다’ 정도 되겠다. 인터넷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냥줍’이 유행한지는 제법 되었다. 이유가 뭘까? 단 두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이 짧은 단어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먼저 왜 고양이인가? 도시에서 동물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개도 있고, 도시의 하늘과 광장을 배회하는 비둘기도 있다. 유기견도, 비둘기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신세는 매한가지였는데, 사람들은 특히 고양이를 많이 주웠다. 다음 문제는 왜 ‘사거나’, ‘입양하지’ 않고, ‘줍는가’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가게에서 돈을 받고 팔린다. 어떤 고양이들은 그렇게 팔리기도 하지만, ‘냥줍’의 대상이 된 고양이들은 다르다. 상품으로 팔리지 못하는 고양이를 누군가 줍는다.
왜 이 고양이들은 팔리지 못할까?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길거리 어디에나 살고 있기 때문에 희소성이 없다.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주울 수 있는 것을 살 사람이 있을 리가. 희소하지 않아도 유용성이 있다면 팔리겠지만, 고양이에게는 유용성도 별로 없다. 집을 지키지도 않고, 인간에게 충직하지도 않다. 고양이에게 집이라는 개념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좋으면 눌러앉고, 떠나고 싶으면 훌쩍 떠난다. 가둬두지 않는 이상 ‘내 것’이라고 소유를 표시하기에도 애매하다.
고양이는 입맛도 까다롭고, 예민하고, 사교성이 적은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다. 그런 주제에 비굴한 구석이라곤 없이 뻔뻔하고 도도하게 군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가와 은혜라도 내려주듯 앞발을 턱 얹는다. 갑질하는 사장님이나 밀당에 도가 튼 애인처럼 구는데, 도시의 호구인생에게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정신 차려보면 장난감을 흔들며 관심을 구걸하고 있고, 가벼운 애교라도 잠깐 부릴라치면 어렵사리 차렸던 정신도 다시 혼미해진다.
가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고양이를 ‘냥줍’할 때도 있는데, 갓난아기 돌보듯 시간 맞춰 먹이고 싸게 해 줘야 한다.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했다는 우리의 청춘들에게 출산의 고통보다 양육의 고단함을 먼저 겪게 하다니 정말 요망한 짐승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양육의 고단함뿐이랴. 부양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의 보람과 고충마저 알게 한다. 그렇게 최저시급 알바비는 곧 고양이 사료 값과 화장실용 모래 값으로 소모된다.
햇볕이 넉넉한 날에는 길에 드러누워 졸다가 기지개 켜고 하품이나 하면서 어슬렁대는 이런 작은 짐승이, 애초에 어떻게 도시에서 이토록 번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걸까. 따지고 보면 도시라는 곳의 정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멀끔하고 반듯하게만 보이는 도시의 외관은 온갖 음습하고 지저분한 것들을 능숙하게 감춘다. 고층의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설수록, 도시의 그늘은 짙고 깊다. 그 짙고 깊은 그늘에 적응하는 생명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 생명체들에게 도시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 도시는 그 생명체들을 배려하지 않으니까. 취업을 준비하며 그 좋은 20대를 다 보내거나 혹은 그마저도 포기하고 은둔해버린 청춘들에게 고양이만큼 좋은 짝이 있을까. 제 몸 하나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돌보기 힘든 지금의 청춘들에게 고양이만큼 위로와 공감을 주는 생명체가 있을까. 도시의 청춘들은 ‘냥줍’을 통해 도시의 척박함을 이해하고, 책임감을 배운다.
도시의 그늘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 작은 육식동물은 최선을 다한다. 햇볕 아래 걸음은 한가로워 보이지만, 강한 적이나 먹이가 나타났을 때는 누구보다 재빠르다. 작은 턱 안에는 뾰족한 송곳니를 숨겼고, 찹쌀떡마냥 부드럽고 폭신해 보이는 발가락 사이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다. 생존의 본능으로 무장하고 버틸 때까지 버티다 못 버티게 되면,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구호를 요청한다.
따뜻한 집 안에서 배불리 먹으며 있을 때도 야생의 본능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낯선 침입은 위협으로 간주하고, 빨리 움직이는 물체에는 눈동자부터 반응한다. 평생을 도시의 그늘에서 타인의 호구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깨우치고 습득해야 할 야생의 생존본능을 거기서 배워야겠다. 아니, 이미 ‘냥줍’을 한 순간 우리의 호구는 이미 철저하게 생존을 도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시의 깊은 그늘에서 공생의 서약이 이루어졌는지도.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