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고용은 없다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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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에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이 바뀐 게 뭐가 대수냐 싶지만,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이름이 바뀌었겠나 싶다. 콕 집어 이명박 탓이냐 물으면, 이명박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확산시키거나, 아니면 저지할 역량이 있었을 리가 없으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이명박은 세계적 흐름을 타고 한 국가의 한시적 수장이 되어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데에 모든 권한을 동원했을 뿐이다. 그때부터일까. 노동보다 고용이 앞서는 문제가 되어버린 게 말이다.

한 사람이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임금과 자신의 노동을 교환하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노동계약이고,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고용이다. 노동계약과 고용은 이 계약관계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누군가가 더 많은 고용을 원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더 많이 고용해서 대규모의 작업장에서 한꺼번에 작업할수록 생산성은 높아졌다. 생산성을 높이려고 기술도 혁신하고, 설비도 조금씩 자동화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에 고용이 조금씩 덜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노동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노동생산성을 점점 높이려고 노력했다. 노동력이 자신의 유일한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스펙spec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능력은 노동시장에 진열된 상품의 사양과 같다. 이 상품의 사양은 자꾸만 높아지는데, 정작 고용은 덜 필요해진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고사양의 상품을 헐값에 팔 수 없고, 비싸게 사서 아무 곳에나 부려먹을 수도 없다. 결국 노동시장에는 재고가 넘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업무는 기계나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되었다.

고용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괴로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고용되지 못하였지만 어쨌든 임금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기에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다.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기에 앞서 고용을 요구하거나 부탁해야 하는 처지는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정신적으로도 위축되고, 경제적으로도 위축된다. 스스로를 쓸모없다 여기게 되고, 실제로 쓸 돈도 없어진다. 그럼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시켜야 하는 이들은 과연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지 않다. 기계나 인공지능프로그램에게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니 이윤이 늘어서 좋았다. 생산성은 좋아졌는데, 판매량은 줄었다. 임금을 받지 않은 기계나 인공지능프로그램은 소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하지 않아서 좋을 줄 알았는데 잠깐뿐이었다. 임금과 노동이 자본주의사회를 움직이는 윤활유임을 잊은 탓이다.

윤활유가 말라버린 사회는 뻐걱거리기 시작한다. 경기는 침체되고, 유통은 멈추고, 신용은 잠겨버린다. 고용하지 않으니 멈춰버릴 듯싶은 상황에서 몇몇 경제학자들이 꾀를 낸다. 다시 임금을 지급해야겠다고. 이번엔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소비를 위한 급여이다. 물론 자신들이 지급하지는 않는다. 기업은 막대한 세금을 납부하였다면서, 당당하게 국가에 요구한다. 국민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 임금을 ‘기본소득’이라고 부른다. 기본소득이 구제하려는 대상은 노동자 혹은 빈민이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2016년에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투표는 77%의 반대표로 부결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이들은 국가재정을 걱정했고, 장기적으로 금액을 현실화하여 낮추자는 의견을 냈다. 실업의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이 놀랍게도 국가의 재정을 먼저 염려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좌·우파에 속한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좌파들은 다른 사회복지서비스가 기본소득에 통합되어 사라지는 것 때문에 반대했다. 우파들은 기본소득이 사회주의화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바람이었다.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고 얻는 소득에 거부감을 느꼈다.

지난 2019년 3월 스웨덴에서 독특한 채용공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화폐로 환산하면 첫 임금이 263만원, 연 3.2%씩 인상되며 고용이 평생 동안 유지된다는 공고였다. 평생 고용보다 눈에 띄는 점은 고용된 이에게 배정된 업무가 없다는 점이다. 출근과 퇴근, 스위치 켜기와 끄기가 유일한 업무이다. 노동이 없는 고용이 제안된 셈이다. 스웨덴 정부가 제안한 이 프로젝트의 취지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이다. 앞으로의 노동이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임을 보여주는 이 프로젝트의 제목은 ‘영원한 고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고용’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노동도, 고용도, 임금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에게 아직 노동과 고용, 임금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노동자들은 지금껏 인간의 노동을 고찰할 여유가 없었다. 전문가들이 노동의 종말을 예견하는 지금 시대에 와서는 노동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라고 강제로 요구 받는다. 노동 없는 고용, 노동 없는 임금. 노동력을 팔아 생활해야 하는 노동자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이가 많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우리 노동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고, 주는 대로 쓰며, 고분고분 자본주의사회에 기름칠 해 주는 역할을 맡기가 쉬울 테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축소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노동절의 역사로 남아있다. 싸움의 기록들이 무덤가의 빛바랜 조화다발처럼 멀고 쓸쓸하다. 노동이 소멸된 사회에서, 그래도 작은 쓸모가 남아 사회에 기름칠을 하며 살아갈 미래의 우리들은 노동절에 어떤 기록을 남기게 될까. ‘영원한 고용’이 남긴 충격 속에서 떠밀리듯 새삼스럽게 우리의 ‘노동’이 무엇인지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며,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을까.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