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라는 짐승 화폐가 생겨나면서 이제 공동체는 사라졌다. 상품은 화폐를 통해 가치가 매겨졌고 유통 수단의 역할까지 도맡게 되었다. 화폐의 진면목을 살펴보기 위해 마르크스는 우리의 친구 아마포 직조공을 따라 시장에 나가보자고 제안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화폐의 변신을 보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마포 직조공이 성경책을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책을 가진 사람은 아마포가 아니라 위스키를 갖고 싶어 했다. 물물교환은 불발될 위기에 처해졌다. 해결책은 ‘화폐’였다. 아마포 직조공은 아마포를 2파운드의 화폐로 교환했고, 2파운드로 성경책을 살 수 있었다. 화폐가 아니라면 결코 쉽지 않았을, ‘상품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아마포 직조공은 원하는 성경책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아마포를 생산하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였다. 직조공은 세상의 모든 아마포 생산자와 경쟁하게 되었고 상품의 가치는 추상노동의 평균값에 따라 사회적으로 매겨졌다. 일한 만큼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고 판매자로서 아마포 직조공의 삶은 녹녹치 않게 되었다. 이제 아마포 직조공은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다른 판매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각자 도생하라, 그러나 운명은 함께 맞는다!’ 이제 판매는 끝이 났다. 다음은 구매의 장이다. 구매란 화폐를 매개로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건을 넘겨받으면서 화폐의 과거 흔적은 모두 지워지게 된다. 말하자면 냄새가 사라지는 것이다. ‘탈영토화’되는 화폐. 여기서 우리는 화폐의 냉혹한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화폐를 통해 ‘판매’와 ‘구매’가 구분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판매와 구매 사이에 시, 공간의 간격이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물건을 팔고 구매에 나서지 않는 시간의 간격이 길어지며 ‘공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제 값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추밭은 갈아엎어지고 옷을 무더기로 땡처리 된다. 구매자로서 아마포 직조공은 또 다시 위태로운 삶의 줄타기를 해야 하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공황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 언제든 생겨날 수 있는 위기이다. 위태로운 것은 직조공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이다. 이제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화폐의 성격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화폐는 금 상품에서 시작된 것이고 국가는 그것을 대체할 증표나 상징을 유통시킨다. 실제로 통화는 국가의 관리 아래 ‘국민 제복’을 입고 있은 채 국가적 강제를 통해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타당성’을 인정받는다.’(150쪽) 뭐니 뭐니 해도 화폐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돈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돈은 마치 몸속의 혈액처럼 사회 구석구석을 돌며 경제를 순환시킨다. 화폐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면 상품거래의 수가 증가하면서 화폐량은 감소하는데, 반대로 유통 속도가 느려지면 상품 거래수가 줄어들어 화폐량은 증가한다. 그런데 우리는 화폐의 유통 속도가 느려지면 돈의 부족을 느낀다. 상품 거래수가 줄어든 것을 화폐 통화량의 부족으로 착각하며 상품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이유를 분석하는 대신 돈을 더 투입하려 한다. 돈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고약한 짐승이다. 화폐는 거대한 힘을 키워 절대적인 ‘부’의 형태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기도 한다. 종이 쪼가리인 화폐가 금을 대체하는 순간, 우리는 상품의 가치보다 언제든 상품을 살 수 있는 돈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화폐의 세 번째 기능인 ‘화폐로서 화폐’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화폐는 치부욕의 대상이자 원천이 되는데, 이는 한계가 있는 물욕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화폐는 ‘축장 화폐’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돈을 쌓아놓고 있으면 언제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회적 힘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는 한계 없는 치부욕으로 이어진다. 화폐는 이제 지불 수단으로서도 힘을 발휘하게 된다. 상품 유통이 발전하면 상품을 건네는 것과 값을 치르는 사이 시간적 괴리가 발생한다. 이 사이에 채무 관계가 이루어진다. 제 시간에 값을 치루지 못하면 언제든 살을 깎는 채권자의 칼날이 몸을 파고 들어온다. 화폐조세의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화폐조세가 화폐의 유통을 확대 발전시키긴 했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생산 방식와 인간관계를 파탄 나게 만들기도 했다. 값을 치루든, 조세를 내든 돈은 더욱 필요하게 되었고 돌고 도는 방식은 이제 숙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화폐를 화폐 자체로, 금덩어리 모습 그대로 원하는 ‘세계화폐’가 있다. 지불수단으로서 화폐가 거래의 시간적 확장의 문제였다면 세계화폐는 거래의 공간적 확장과 관계한다. 국제간 교류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부’를 이전해야 할 때 사용한다. 해외원조금이나 전재배상금 같은 것이다. 이는 유통수단과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국내수요와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구매와 판매자로서의 아마포 직조공을 따라가 보니 결국 화폐라는 짐승과 만나게 되었다. 변신의 귀재이며 기괴한 힘을 가진 그 짐승을 우리는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그것이 돈이라면, 이 자본주의에서 이 운명을 바꿀 방법은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밀려온다. 그렇다면? 질문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