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과거 경험들이 떠오른다. 옛 수유+너머 시절 글쓰기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한쪽에서는 글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 했고, 다른 쪽에서는 글을 무슨 몸으로 쓰느냐 이야기했다. 연구실 말단 막내로 그 논쟁을 곁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하여 그 논쟁의 전모도 결말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문심조룡>을 읽으며 글쓰기의 신체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지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반드시 쌍을 이루며, 문사도 왕왕 대를 이룬다."(678) 여느 동아시아 지식인과 비슷하게 유협 역시 자연에서 글쓰기의 이상을 찾는다. 크게 보아 글쓰기의 방식은 천지자연의 원칙과 함께 한다. 물론 그것이 완성된 총체적 사유의 모습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후세의 논자들은 더욱 꼼꼼하게 이를 이론적으로 엮었으리라. 그러나 유협에게는 그런 치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의 신체성에 대한 유사한 담론이 어른 거리고 있다.
물론 이때의 신체란 물리적인 몸뚱이만 의미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주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자. 이 관점에서 보면 글이란 주체의 연장이자 확장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글을 통해 글쓴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식. 반대쪽에는 글쓰기는 하나의 기교이며 기술이라는 주장이 있을 테다. 굳이 이야기하면 나는 전자에 편향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글쓰기 지도에 앞서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지적이 곧 그 사람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글쓰기를 지적받는 것은 왜 아플까. 글이란 나의 일부인 까닭이다. 설사 그것이 마치 배설하듯 써재낀 것이라 하더라도.
글쓰기가 업이 되었다. 글을 쓰노라면 한 편집자와의 일이 떠오른다. 원고를 번번이 미루었다. 약속한 날짜를 어기기 일쑤. 왜 그렇게 편집자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을까. 지금도 턱 밑까지 날짜가 닥쳐야 원고를 쓴다. 원고를 미루고 미루는 데는 자기혐오의 두려움이 있다. 편집자는 글로 밥 벌어먹지 못할 것이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그 악담은 내내 환영처럼 들러붙었는데, 지금은 좀 그 사슬에서 자유로워졌다.
하여 이런저런 경험 끝에, 글쓰기에 대한 책은 죄다 쓸모없다는 생각이다. 저마다 자기 만의 길이 있을 뿐이며, 남의 길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을 익혀야 비로소 글쓰기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여기까지 털어놓고 보니 유협보다 더 글쓰기에 신체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협의 글은 꽤 흥미로웠다. '34 장구, 35 여사. 36 비흥, 37 과식'은 문장론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기 때문이다. 어떻게 문장을 지을 것인가. 어떻게 문단을 이루고, 글에 어떤 흐름과 맥락을 부여할 것인가. 대우, 짝을 이루는 문장을 이용하는 법. 비유를 사용하는 법. 과장의 힘과 같은 것들은 여전히 중요한 기술들이다.
"창작은 감정과 의지를 적합한 장소에 배치하고, 언어를 적절한 위치에 배열하는 것이다. 감정과 의지를 적합한 장소에 잘 배치하는 것이 바로 장절을 구분하는 것이고, 언어를 적절히 안배하는 것이 구를 만드는 것이다." 글은 필연적으로 흐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흐름과 리듬으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점은 중요하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글이 있을 수 있고, 광광 울리는 글이 있을 수 있다. 조리 있게 서술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반전과 충돌로 주의를 끄는 글도 있다.
다만 유협의 논의는 시대적 특성상 운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하다. 구어口語 전통보다는 문어文語 전통이 강한 오늘날의 글쓰기와는 조금은 거리가 있다. 그러나 글의 내재적 구조와 논리에 중점을 두는 방향이 있는가 하면, 글의 언어적, 음성적 흐름에 중점을 두는 방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전에는 전자에 관심이 많았다면 현재는 후자에 더 관심이 많다. 읽히기 위한, 일종의 대본과 비슷한 형태의 교안을 쓰고 있기 때문이겠다.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면 아이들을 글쓰기를 보건대, 과거의 글쓰기와 말하기의 관계가 글쓰기에서 말하기로 향했다면 혹은 둘 사이에 단절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글쓰기는 말하기에서 글쓰기로 향한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말하듯 글쓰기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글의 리듬과 흐름이 더 중요할 것이다. 시대와 구조는 다르나 유협의 논의와 발견이 도움을 줄 수 있겠지.
한문漢文을 가르치면서 대구對句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대구로 이루어진 문장은 대구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 이렇게 짝을 이루는 문장을 '여사麗辭'라고 하는 점이 흥미롭다. 이 짝은 문장의 리듬을 구성하며, 의미를 확장, 강조, 뒤섞는다. 개인적으로 글에서 이런 식의 수사를 사용하곤 하는데, 중간중간 리듬을 부여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일 테다. 역자 저우전푸는 유협의 논의를 빌려 의미가 완전히 중복되는 구절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구의 단어 의미가 완전히 중복되면 이를 합장合掌이라 부르는데,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할까?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다.
비흥比興이란 비유와 감흥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어떤 사물을 통해 감정을 이끌어 내는 것. 개인적으로는 비유를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어째서 그럴까 생각해 보았더니, 비유란 통념에 근거한 것인 까닭이다. 너무 재미없지 않나. 예컨대 까마귀로 거짓을 표현하는 것 따위가 그렇다. 한편 이는 시대의 흐름이 빠른 까닭이 아닐까 싶다. 과거에 사용되던 비유가 오늘날에는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왕왕있다. 자연과 점점 멀어지는 까닭도 있지 않을까. 목석같다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 사물과 사건을 빌어 감정을 일으키는 일은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도리어 과식夸飾, 과장된 꾸밈에 더 눈이 간다. "과식이 사물의 요점을 최대한으로 포착할 수 있다면 독자 마음속 공명이 봉기하지만, 과장이 사리에서 벗어난다면 언어와 실제가 서로 등을 돌린다." 현재를 넘은 표현, 실상을 벗어난 언어는 힘이 있다.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감각을 깨우는 까닭이다. 하여 글은 늘 주체보다 한 발 앞서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실제로 감정과 생각을 이끄는 글이 있다. 글쓰기는 자신을 재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하는 활동이다.
내지르는 글쓰기. 주장, 단정, 예언적 글쓰기. 하여 나의 글에는 뚝뚝 끊어내는 말, 단언이 많다. 이러니 논문 같은 글을 못 쓰지. 유협의 글을 읽으며 '글을 쓴다는 것과 문장을 짓는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 들었다. 둘은 하나지만, 또 따져보면 경중과 선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전자가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문장으로 글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글이 문장을 뱉어낸다 생각한다.
누구나 하는 말이겠지만 글에는 천 개의 길이 있고, 문장에는 만 개의 형식이 있을 테다. 결국은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쓰기에 모방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 힘으로 우뚝 써야 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