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푸코] 다른 방식으로 지배받기, 혹은 지배하기2025-01-13 12:26
작성자

미셸 푸코: 권력의 꼭두각시로 살지 않기 위해2장 영혼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3장 인간은 모두가 기업이다

 

얼마 전 스불재라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줄임말이다. 어떤 일의 부정적 결과가 자기 자신의 선택에서 초래했음을 알고 후회 혹은 자조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들은 나는 좀 의아했다. 재앙 수준이라 할 만한 일이 과연 개인의 선택으로 일어날 수 있나. 재앙은 인간이 피하기 어려운 불행이다. 선택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재앙을 막을 선택지가 우리에게 과연 있기나 한가.

 

농담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나는 이 스불재라는 말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과 함정을 엿본다.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초래했다는 이상한 믿음이 퍼진 사회. 빈곤한 개인에게는 불성실과 무능력을 화두로 추궁이 이어진다. 병든 자에게는 평소의 생활 습관을 문제 삼으며, 범죄자는 악인으로 낙인찍는다. 사기를 당한 이는 어리석다는 지적을 받으며, 집단의 규율을 따르지 않은 이는 이기적이거나 예민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빈곤과 질병, 범죄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는 일, 집단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지 못하는 일은 모두 개인의 선택보다 사회의 구조나 압력 때문일 때가 많다. 개인의 선택은 이미 가득 채운 잔에 한 방울의 물을 더할 뿐인데도, 잔이 흘러넘치는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일이 허다하다. 사회(혹은 국가)가 개인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해줄 수 없고,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는 양상은 군주의 시대와는 다르다. 푸코는 권력이 억압적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일방적 지배-피지배의 관계도 아니라고 말한다.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은 금지하는 권력이 아니며, 무언가를 생산하고 말하게 만드는 방식의 권력이다. 특히 생명권력의 시대에 국민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국가에 요구하면서 권력의 지배 안으로 포섭되고, 자신이 주체이며 자유롭다는 믿음을 품게 된다.

 

신민으로 주체화되는 근대 국가의 모델을 푸코는 기독교의 사목권력에서 찾는다. 종교 안에서 신도들은 목회자와 각각 일대일의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 안에서 고해성사가 자리 잡으면서 더 강화된다. 영혼을 지도하면서 평생 인도하는 관계는 근대 국가가 생명을 관리하는 관계로도 연결된다. 기독교의 지배와 규율 방식이 세속화를 거치면서 병영, 감옥, 작업장, 학교로 퍼져나갔다고 할 수 있다.

 

푸코는 기독교 사목권력의 원형을 고대의 자기 기술에서 찾는다. 고대의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지배계층의 자기인식과 돌봄(배려)을 위해 애썼다면, 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며 이 자기 기술은 더 일반화된다.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 기술을 연마했고, 이는 자기통치와 타자통치의 기술로 이용된다. 푸코는 이 기술이 초기 기독교에 흡수되면서 자기수양의 기술이 아닌 자기포기의 기술로 나아갔다고 판단한다.

 

푸코가 자신이 살던 지역과 시대의 문제를 점검하면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낸 답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자기를 포기하는 신민의 주체화 기술로 변형되는 지점이었다. 자기를 포기하면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 일, 자기 삶을 결정할 권한이 없음을 알면서도 선택이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일, 자기에 대해 아는 일은 개인이 스스로 해낼 수 없으며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에 수긍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이토록 무력한 개인들과 스불재라는 단어의 조합은 꽤나 기묘하다. 자신을 믿지 못하면서도 재앙의 원인을 자신으로 돌리며, 사회와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단어이기에 그렇다. 사회의 피해자이지만 단순히 피해자로만 남지는 않겠다는 태도가 거기서 엿보인다. 어떤 방식으로 지배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겠다는 태도와 연결된다면, 가해자의 일원임을 자처하는 그들은 어떻게 지배하려 할까.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