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적인, 하지만 더욱
전복되어야 하는 에레혼 ‘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글이 있다’는 말은 중국 문학사의 격언처럼 통용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언급한 시대별 대표 장르의 면면을 뜯어보면 위화감이 느껴지곤 한다. 시대를 대표하는 장르의 목록을 살펴보자. 선진시기의 시경-초사, 한나라의 부賦, 위진남북조의 변려문, 당시와 송사,
원나라의 희곡, 명•청의 소설. 이 시대별 장르
변천의 리스트 맨 마지막 부분에는 작은 반전이 있다. 해당 리스트에서 소설 하나만 지나치게 ‘통속적’인 장르 아닌가. 소설이 주류가 되기 이전까지, 중국 고대
문학의 창작과 향유는 지식인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문인관료’라는
용어를 곱씹어보자. 이 단어는 고대 중국이 ‘관료가 아니면
문인일 수도 없는’ 시기라는 함의를 담은 게 아니다. 그저
중국 전통 사회에 전업 작가가 극소수였다는 사실을 반영한 용어인 셈이다. 명대 중후기를 넘어서면 세속적 어투로 문장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통속 문학 장르에 대한 예찬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명•청 시기가 대중 문학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동시에 명•청조 이전 시기까지만 해도
‘대중 영합적’인 글을 쓰는 일은 식자층이 할 게 못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통속소설에 대한 진지한 비평을 시도한 이(이탁오), 아예 통속적인 문체로 쓴 글이 좋은 작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이(풍몽룡), 지식인 필독서에 희곡과 소설 작품을 끼워넣는
이(김성탄). 이들은 모두 변화한 세상을 이야기하고 여전히
변하려 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향해 충격을 선사하고자 했다. 명•청대 문학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근대 맹아론이나 동양 독서 시장의
이른 형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아님을 먼저 밝히며 발제문을 이어야겠다. 전조망과 요내에 대한 천핑위안의
설명을 읽고 명•청 문학 전반의 특징을 길게 언급했던 이유는, 전조망•요내의 글에 해당 시기의 문화적
특징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글, 그리고
명대와 청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정조는 (독자와의) ‘공명’, 그리고 ‘공감’이다. 명•청 이전 시기의 운문, 편지글, 그리고 단편적인 소설들 중에 현대의 독자들이 설명없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는 소수에 불과하다. 명조와 청조 이전 문인들에게 글은, 선현의
말이나 관념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유려한 산천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매개체로서 기능했다. 이런 글은 풀어서 쓸 필요가 없다. 글을 짓는 사람도 받아보는 사람도
지식 계층이니, 자연스레 글에는 코드가 담겼다. 코드의 해독을
위해서는 경전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시의 운율에 능통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직함에 있어야 했다. 명•청조, 명•청대, 하도 붙여서 말하다 보니 그 시기가 얼마나 되는지 간혹 감이 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 544년이다. ‘2천년 중국사’라는
관용구와 붙여서 보면, 후반부 4분의 1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학이 지식인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어 온 시기가 전체 중국사의 상당수인 셈이다.
이러한 문학 헤게모니의 균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출판 시장의 성장이 주요 변수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돈을 위해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매문가賣文家라는 말이 멸칭처럼 붙는 때가 있었으나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족히 수만명의 식자층이 있었다. 이들은 녹봉 대신 고료와 과외료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생활 환경과 경제 조건의 변화는 명•청시기 문인들의 글 쓰는 방식과 글의 제재•주제에
변모를 이끌어냈다. 군주에게 성현의 가르침을 전하는 상소문이나 관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이 독서
시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산천이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운운하는
시집과 애정 소설 가운데 서방書房에서 더 많이 팔리는 건 어떤 것일까? 이런 무의미한
물음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이 시기 작가들이 대중에게 팔리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잘 팔리는 글을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대중과 밀착할 기회가 더 늘어나서였을까? 전조망과 요내의 사례를 보면 이들의 글이 명•청시기 이전 문인들의 문장 스타일과
달리진 건 단순히 상업적 고려 때문만은 아닌듯하다. 대중과 밀착할 기회가 증가했다는 말은 명•청 지식인들의
공간적 지향이 자연에서 도시로 변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명대 이전의 작가들은 (조정과 저잣거리로부터 떨어진) 관념상의 자연을 지향하고 그 공간을
시적 제재로 삼았다. 심지어는 자신만이 그러한 자연을 알아본다는 것에 내심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명•청시기에 접어들면 이러한 자연 공간은 속세와 혼재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만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도, 강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여전히 유효한 격언처럼 통용되긴 했다. 하지만 명•청시기의 작가들은 문장 속에서 서역과 동해를 넘나들며 방구석에서도 천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전조망과 요내의 글 역시 전통적 글쓰기의 작법을 이탈하며 전복한다. 전조망은 《이주선생의 사구록 서문》에서 “산천의 도움만으로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명청산문강의》 속 더 자세한
설명을 살펴보자.
글을 잘 썼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개인의 재능에 따른 것이지만 묘사 대상과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전조망이 쓴 《이주선생의
사구록 서문》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예전에 글이라는 것은 산천의
도움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인물을 통하여 정련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전조망의 시각에서 보면 황종희의 글이 좋았던 것은 그가 대격변의 시대를 살아서
어려서부터 여러 종류의 엄청난 일들을 경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일류 인물은
안목이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라 그가 친구를 추억하는 글을 쓸 때에는 견문이 뒤섞이게 되는데 이러한 글은 저절로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小嬌流水’,
'가난한 집의 고운 딸小家碧玉’과는 다르게 되었습니다._352쪽.
그는 자연에서 체득한 바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동시대
사람들과 얽히고설킨 역사적 맥락, 그리고 글쓴이의 개인사라고 본 셈이다. 즉, 혼란스러운 시기와 그 시기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과
부딪히는 경험이야말로 문장을 새롭게 정련해내는 열쇠라는 이야기였다. 이는 이전 시기 문인들이 자연이나
경전에서 한정된 영감을 끌어올리던 구도를 넘어, 도시나 저잣거리의 생활 경험이 글쓰기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내 또한, “인물이 산수보다 우선한다”는 듯한 논의 순서를 활용하여 동성桐城 출신 작가들의 성취를 먼저 강조하고, 그 뒤에 동성 지역의 아름다움 또는 역사적 특성을 서술한다. 일반적으로
중국 문학은 ‘산수가 빼어나니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다’는
논리적 흐름을 따르는데, 요내는 이를 의도적으로 역접한다. 이러한
서술 전략에 대해서 천핑위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하의 문장은 동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선명하게 편향적인 질문에 대해 요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중략)...'천하의 기이한 산수'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천하의 좋은 글이 정말 동성에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간 것입니다. 저자는 딱 잘라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산수가 이렇게 수려한 것이 사실이니 어찌 가짜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나오는 '아름다운 물산은 천연의
보배物華天寶’,
'빼어난 곳에서 뛰어난 인물이 난다(人傑地靈)라는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작법을 따른다면 "황산黃山과 서성舒城
사이의 산수는 천하에 기이하다"로 시작한 뒤에 다음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지만 요내는 오히려
사실 진술과 자신의 해석 순서를 바꿈으로써 천하의 좋은 글들이 동성에 있다는 주장을 더 확고하게 하였습니다._374~375쪽.
천하의 문장이 왜 동성에서 나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미 동성 출신 명인들이 이렇게 훌륭하다”면서
독자를 작가의 적극적 해석의 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는 ‘자연 → (지역) → 인물’이라는
전통적 서술 구조를 일부러 전복해, 글쓴이의 논점에 힘을 싣는 글쓰기 책략이다. 결과적으로 전조망과 요내의 전복적 글쓰기는, 명·청 시기의 문인들이 “자연을 체험하되, 시대와 인물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는 무조건적인
청아함을 추구하기보다, 더 폭넓은 독자층 및 도시 생활자들과 접점을 찾으려는 작가들이 늘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경전의 주석이나 사서 정리는 이제 학문의 영역으로 이전되었다.
서적 출판 시장에서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생생한 현실을 기록하고 대중과 공명하려 한
글들이었다. 명·청시기 문학의 변화 양상은, ‘소설’이나 ‘희곡’ 같은 장르분화만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과 논리 전개의 틀
자체의 변화를 포함한다. 전조망과 요내의 글쓰기는 기존 문인 계층의 특권적 작법을 일부러 뒤틀어 글은
더 이상 고고한 곳에서만 탄생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글이 과연 ‘대중적’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점은 명•청대를 기점으로 변화의 물꼬는 이미 트였으며, 물이 터져 나오는 틈은 더욱 벌어져 후대의 ‘문학 혁명가’들의 탄생을 예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