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기술/철학] 동양'스러움'을 찾아서2025-02-0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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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1주차 / 20250204

동양‘스러움’을 찾아서

에레혼

'기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중국과 기술에 대한 책을 읽다 보니, 중국제 전기차나 중국발 생성형 AI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은 이런 인사이트 지식 제공형 도서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 육후이는 기술이 단순히 기계나 도구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삶의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까지도 기술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기술이란 ‘세계관’이자 ‘우주론’이다. 이 책은 ‘기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서 출발하여, 기술과 인간의 관계, 기술이 인간의 삶과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찰한다. 

‘굳이?’라는 물음을 떨치기 어렵다. 왜 기술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해야 하는가. 저자는 ‘코스모테크닉스’라는 난해한 개념마저 제시하며 기술에 대한 사고를 뒤집을 것을 요구한다. 육후이가 기술에 대해서 재정의하는 이유는, 기존 개념어에 담긴 부정적 파급력 떄문이다. 지금껏 기술이란 용어는 서구의 프레임을 통해 구축되어 왔다. 스마트 자동차니, 인공지능 로봇이니 하는 첨단 발명품이 기술과 일차원적으로 연관되는 현상은 기술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대변한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일. 서구 기술의 역사는 곧 발전과 착취의 연대기이다.

최근 수십년간 이루어진 거대한 가속화는 또한 다양한 형태의, 즉 문화적, 환경적, 사회적, 정치적 파괴로 이어졌다. 우리는 지금 ━ 지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 대략 18세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인신세라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인신세에서 살아 남으려면 근대로부터 물려받은 실천들에 대한 성찰과 변형이 요구된다. 근대(성) 자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본문 74쪽)

살아남기 위해. 기술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야 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이다. 인식을 전복하려면 기술에 대한 서구적 이해라는 유일신앙을 탈피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코스모테크닉스’이다. 해당 개념은 기술을 단순히 도구나 기계로 보지 않고, 우주론•윤리•미학 등과 같은 문화적 가치와 얽힌 총체로 받아들인다. 기술을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곧 육후이의 학문적 기획이다.

그럼에도 육후이의 주장은 기존의 ‘동양적 대안’과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하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반응은 그간 동양적 사고를 통해 이성의 폭주나 지구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나이브한 대안이 즐비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의 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책에서는 ‘기술에 대한 동양의 논의는 실은 고대부터 예비되어 있었다’는 식의 근원 탐색 프로젝트와 궤가 다른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문구에서 육후이의 동양 인식은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인상을 준다.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 또는 적어도 서구의 몇몇 철학자가 규정하는 바에서의 기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문 76쪽)

이러한 육후이의 진단을 서양에 대한 열패감의 발로나, 동양의 낙후성에 대한 비하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육후이는 해당 가설을 통해 서구 중심적 기술관에 내포된 편견과 오해를 드러내며, 기술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다. 서구의 기술관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느 문명의 기술력이든 선진적인 기술력은 존재할 수 없다. 육후이는 중국의 전통적 기술관을 재조명하는 과정을 경유하여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논한다.

동양적 사고가 서양의 사고 방식과 얼마나 다르길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짧은 문장으로 압축 가능하다. [중국인들은 이미 신(성)을 자연화했던 것이다. (본문 83쪽)] 서양식 사고의 전형인 그리스적 사고는, 신성/신화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탈피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신화란 고대인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한 스토리텔링’ 운운하는 것이 바로 신성과 자연이 혼재된 고대를 설명하는 서양의 방식이다. 이와 대비적으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늘과 대지, 물 등의 용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사고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오히려 그러한 신화 각각은 기술에 대해 각각의 경우 신, 기술, 인간 그리고 우주의 상이한 관계에 상응해 서로 다른 기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본문 84쪽)] 기술의 구체적 형태는 지구 상의 문명 개수만큼, 국가의 숫자만큼 다양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기술의 형태, N개의 테크네 중에서도 ‘중국의 테크네’, 코스모테크닉스가 대안이 되어야 할까?

코스모테크닉스라는 개념은 즉각 우리에게 기술과 자연을 관습적으로 대립시켜온 입장을 극복하고 철학의 과제를 이 둘의 유기적 일치를 추구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적 도구를 마련해준다. (본문 87쪽)

중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화법 중에 ‘예전부터 이미 존재했다(古已有之)’는 어구가 있다. 시몽동이나 인골드 같은 학자들이 필생의 연구로 삼던 통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사고는 동양인들의 전공이나 다름없다. 이는 문화적 자부심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진단이다. 

몇몇 근거를 찾아보자. 맹자가 남긴 말 중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그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라는 문구가 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과정만으로도 하늘의 뜻에 따르는,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조금 더 교조적인 버전을 찾아보자면 《중용(中庸)》이라는 경서의 한 구절을 빼놓을 수 없다. 

하늘의 명령[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성: 性, 천명에 거스르지 않는 본연의 성질.

도: 道, 인간의 차원에서 따라야 하는 도리.

교: 敎, 도를 닦기 위한 가르침으로 인간이 도를 따르도록 만드는 교육이나 수양법.


맹자가 개인에서 우주로의 확장을 논한다면 《중용》은 역방향으로의 수렴을 이야기하고 있다. 갑자기 중국 고전을 인용하는 이유는 동양에서 ‘감응’에 기반한 사고관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는지 설명하기 위함이다. 육후이는 감응을 ‘하늘과 인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도덕적 감정과 의무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개인 차원의 도덕이 우주의 원리로 확장되고, 우주에서 다시 개인으로 역방향의 논리 전개가 일어나는 것. 동양에서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이야기이다. 

감응이든 공명이든, 이러한 논의가 케케묵은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생경하게 들린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우리는 20세기 초에 ‘왜 동양에는 과학이 없었나’ 하는 자책에 빠져 살았고,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는 서구로부터 전래된 과학을 ‘미스터 사이언스(赛先生, 새선생)’이라는 불러가며 섬겼던 역사가 존재한다. 그 후로부터 100 여년. 이런 긴 시간이라면 몸에 배인 습관이 새로운 습관으로 교체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완전히 체질이 바귄 중국을 두고 육후이는 “황홀경과 현대광고가 출현해 이 나라를 미지의 세계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본문 100쪽)고 진단한다. 육후이의 우려 섞인 분석에서 현대 중국은 이미 지나치게 현대적이라서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 속의 이상적 중국과 너무 거리가 멀다. 

‘응당 그래야 할 중국’의 부재를 탄식하는 일은 왜 대륙 바깥에서 이뤄지는가 하는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113쪽에 언급된 신유가들은 대부분 홍콩과 대만에서 흥기하며 ‘공산당의 신중국’을 보며 내심 안타까워했던 인물들이다. 육후이에게 선배 신유가 학자들의 찌푸린 미간이 겹쳐 보이는 건 단순 착시이길 바랄 따름이다.


-----------------------------참고--------------------------------------

서양의 과학 철학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파악된 모든 보편적 개념과 원리가 직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과 원리들은 하나씩 연결되어 결국에는 구획화된다. 그런데 이 보편적 개념과 원리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를 구체적인 사물에 적용하려고 하면 그 사물의 특정한 측면을 간과하거나 제거하게 된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물의 독특함과 개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 “세계인을 향한 중국문화선언: 중국 학술 연구와 중국 문화 및 세계 문화의 미래에 대한 공동 인식” 중에서, (모종삼, 서복관, 장군매, 당군의 공저,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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