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물질 세계 자체가 기적 <초월하는 뇌>2장2026-01-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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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뇌> 2장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와 영혼


물질 세계 자체가 기적


세균과 감염의 존재를 몰랐던 고대에 죽음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죽고 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죽음 이후의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에서 자주 발견된 것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받는 대상은 ‘영혼’이었다. 이런 생각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을 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 철학자가 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루크레티우스’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사후 세계란 순전히 미신에 불과하며,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이 물질 원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사람이 죽으면 그를 이루던 원자들은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듯 사라진다’고 했다. 루크레티우스는 고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물론자였다.


그는 정신이 육체와 함께 발달한다는 점을 근거로 정신/혼령/영혼의 물질성을 주장했다. 또한 어린아이는 정신이 약하다고 말했다. 정신은 아이가 나이를 먹으면서 함께 강해졌다가 늙으면 다시 약해진다. 루크레티우스가 세상에 대해 유물론적 개념을 펼친 주된 동기는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함이었지만, 인류를 신의 변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모든 것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원자들은 새로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는 신의 힘이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는 원인을 강조하고 세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원인보다 목적에 더 관심을 두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기상학자 겸 천문학자 왕충은 사후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며 “죽은 자의 영혼은 해체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한다고”고 썼다. 루크레티우스와 왕충 모두 살아 있는 육체는 일종의 영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은 물질적인 것이어서 죽으면 해체되어 흩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영혼/혼령은 불멸하는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일종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유물론의 초기 역사에서 시각에 관한 설명이 논쟁거리였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우리 몸에서 신성한 불을 통해 빛을 본다고 주장했다. 반면 원자론자들은 시각에 사용되는 빛이 눈 밖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 대해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감각적 지각과 생각을 통한 것밖에 없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이미지를 보고, 표면의 촉감을 느끼며, 그런 감각을 신경계에서 처리해서 바깥 세상에 대해 추론한다. 하지만 버클리나 다른 철학자들이 주장하듯 세상이 전적으로 정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바깥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영혼의 존재와 불변성을 주장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우리의 육체 너머에는 빛과 산맥, 다른 생명체로 이루어진 물질 세계가 존재한다. 가늠할 수 없는 물질 세계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를 인지한다면, 물질 세계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적 관점과 직접 관련이 있는 오래된 논쟁 중에 생기론 대 기계론 논쟁이 있다. 생기론에서는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이 살아 있는 물질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물리 법칙을 벗어난 비물질적인 생명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도 생기론자이다. 여기에 생명을 지배하는 법칙은 ‘과학(예술)’을 통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덧붙힌다. 과학의 도달 범위 너머, 즉 물질성 너머에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금지된 지식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주장. (밀턴의 실낙원)“신이 그 비밀을 숨겨놓았으니, 살피려 하지 말고 그저 믿으라”는 식이다. 나는 그 너머의 비밀을 알고 있으나 너희는 알 수 없으니 닥치고 믿으라는 사이비들의 주장은 이와 맞닿아 있다. 생기론 학파에서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고 있다. 


생기론의 반대편에는 기계론이 있다. 기계론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생물학적 화학적 흐름에 불과하며 형이상학적 영혼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생명과 생기는 존재의 형이상학적 지점이 아니라 물질의 물리적 속성 중 하나다. 기계론자들에 따르면 말이 뛰고, 이를 갈고, 추운 겨울밤에 따듯한 호흡을 하는 것은 먹이를 섭취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자연 현상이나 밤하늘의 장관 조차 우주의 물리적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원인을 모를 뿐인 현상을 기적과 신의 개입으로 여기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습관인 것 같다. 


생명은 원자와 분자의 특수한 배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현재 자연의 모든 법칙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이나 영성 같은 특별한 경험도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특수한 상호작용일 수 있다. 


망원경의 통해 태양이나 달에 흠집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이들은 하늘의 불변성을 더 이상 옹호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관찰을 통해 천체, 달, 행성, 항성이 모두 지구한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천상이 사실은 천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 우주에 살고 있다. 뉴턴의 중력 법칙,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 에너지 보존 법칙 등으로 세계는 점차 형이상학의 세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유물론자와 비유물론자의 가장 큰 차이는 죽음을 향한 태도다. 이 이상한 우주를 잠깐 스쳐가는 우리라는 존재에게 죽음의 필연성만큼 강력한 사실은 없다. 우리의 사상, 세계관, 예술 표현, 종교적 신념 중 상당 부분이 이 근본적 사실과 타협하기 위한 방편이다. 두 진영 모두 죽음이라는 동일한 사실에서 동기를 부여받았음에도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주 다른 심리적 전략을 제안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비유물론자들은 (착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영혼이 영원히 복된 사후 세계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방어 매커니즘으로서 일종의 사후 세계를 믿는 성향은 과학의 발전에도 별로 약해지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죽고 나면 모두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죽고나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지 않으니 두려워할 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유물론자와 비유물론자를 구분하는 가설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유물론적 세계관과 비유물론적 세계관의 밑바탕에는 그저 과학적 사고의 유무가 아닌 더 복잡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비유물론을 뒷받침하는 생각과 욕망에는 영속성에 대한 깊은 욕망, 완벽성에 대한 갈망, 신성함에 대한 추구 등이 있다. 무(無)를 상상할 수 없다는 점, 살아 있는 존재의 특별함에 대해서도 놓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 너머의 현상인 마법과 기적에 매료된다. 자연의 법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기적을 믿는다. 홍해가 갈라지고 예수가 부활하고 달을 두 쪽으로 쪼개는 기적, 죽은 자의 목소리, 정확한 예언, 염력, 환생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관심을 쏟는다. 따분한 우리네 삶을 기적이 구원해 준다고 여긴다. 기적을 믿는 것은 뇌의 가장 쉬운 선택이기도 하다. 


이번 장의 주인공인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라면 과학적 차원 못지 않게 인간적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타인의 행복을 가치 있게 여겼으며, 죽음의 공포를 반박하는 이성적인 논증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했다. 또한 그는 우정을 가치 있게 여겼다. 그는 선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경외감을 표현하는 글도 남겨 놓았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강물이 밝게 펼쳐지자 하늘의 고요한 별자리들이 물속에서 반짝이며 대답한다.” 물질 세계는 그 자체로 기적임을 루크레티우스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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