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그의 사유, 그의 인격》 들어가며, 1장 세계사 안의 모든 것은 특이하다-‘담론’, 2장 역사적 아프리오리만이 있을 따름이다, 3장 푸코의 회의주의, 4장 고고학, 5장 보편주의, 보편소, 사후형성 – 기독교의 초창기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이면 푸코에 관한 책을 읽는다. 올해는 푸코 탄생 100주년이라 어떤 책을 고를지 더 고민이 되었다. 최근에 새롭게 출간되었거나 번역된 책들이 많았기에 선택지도 그만큼 넓었다.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개정판 옮긴이 후기’였다. 팬데믹 시기에 기 소르망이 제기한 푸코의 성 추문을 다룬 글이다. 푸코에 대한 애정을 넘어 푸코의 사유를 통해 그의 삶에 제기된 문제를 다루어보려는 역자의 의지와 역량에 감탄했다. 저자에게서 느낀 매력도 역자에 못지않았다. 저자인 폴 벤느와 푸코 사이에는 현실에서 접점뿐 아니라 서로 다른 학문 분야에 종사한다는 거리감도 유지되었다. 역사학자인 폴 벤느가 본 푸코, 철학자가 아닌 이가 말하는 푸코가 궁금했다. 폴 벤느는 푸코가 죽은 지 20년도 더 지난 후에, 자신도 70대 노인이 되었을 때 이 책을 출간했다. 노년의 역사학자에게 푸코와의 교류는 무엇을 남겼을까? 무엇이 그가 이 책을 쓰도록 추동했을까? 폴 벤느는 책의 초반부터 푸코가 ‘회의주의자’임을 주장한다. 보편과 일반론을 부정하고, 진리란 언제나 곧 사라질 예정이라 말했던 푸코. ‘사실’을 다루며 과거를 명료화하려는 역사가에게 푸코의 말은 꽤 부담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푸코는 지식 자체를 지층처럼 여기며 새로운 관점으로 단절과 연속을 읽어내고, 자기 작업물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인다. 정작 ‘역사적 보편’과 이론적 토대에 기대 작업하는 동시대 역사가들은 푸코의 작업을 ‘역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폴 벤느 역시 푸코와 교류하던 당시에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책에서는 푸코가 일반론과 진리를 부정했다는 언급이 여러 번 등장한다. 푸코에게 일반론과 진리는 ‘작은 사실을’을 억압하는 존재였다. 더구나 그 진리들은 ‘진실’하지도 않았다. 폴 벤느는 그 말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만큼 여러 번 반복해서 독자에게 전한다. ‘역사적 사실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역사학자로서 말이다. 푸코가 상대주의자가 아닌 ‘회의주의자’라는 주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폴 벤느는 발전론을 불신하는 푸코에게 동조하지만, 유럽 지식인에게는 진리 다음으로 발전론도 버리기 어려운 사상이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전제, 인류에게는 옳은 방향이 있다는 믿음은 푸코가 비판한 ‘인간학’의 중요한 문제들이다. 어쩌면 폴 벤느는 푸코가 심은 씨앗으로 사상의 균열을 겪어온 애꿎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그는 발전론과 진리에 대한 신앙심을 청산하지 못한 채로도 푸코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폴 벤느는 균열의 고통 속에서 푸코를 ‘회의주의자’라 부르기로 한 듯 보인다. 푸코 자신이 들었다면 칭찬도, 비난도 아니라고 느낄, 약간 거추장스러울 꼬리표다. 물론 폴 벤느에게는 단순하지 않은 문제다. 그에게 ‘회의주의자’는 기꺼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비판하지만, 어떤 강력한 대안도 내어놓지 않는 이들, ‘어떤 정해진 대상을 적확하게 인식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형태로 비판하는 이들. 폴 벤느가 보는 ‘회의주의자’는 그를 놀랍게 하는 동시에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다. 단지 폴 벤느뿐 아니라 진지한 태도로 인간과 지식을 다루는 일에 몰두해 온 이라면, 누구라도 그 곤혹스러움을 피하기 어려울 테다. 푸코에게 중요한 일은 비판을 통해 진리를 확보하거나 선점하는 일이 아니었다. 진리를 위해 묻혀야만 했던 사실을 발굴하는 일, 지식 자체가 얼마나 치밀하지 못하고 듬성듬성한지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폴 벤느는 그 부분을 오랜 시간 균열을 감내하며 받아들였다. 인간의 사유는 구멍이 숭숭 뚫린 공허 속에 있음을. 어떤 이상을 조화롭게 채우는 일은 불가능하며, 단지 무수하게 많은 사유가 가능할 뿐임을. 더불어 우리의 사유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음을.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70대 학자가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 혼란의 크기를 상상해 본다. 타고난 ‘회의주의자’인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부분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푸코를 계속 읽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책의 5장에서 폴 벤느는 초창기 기독교 역사를 보편주의와 관련지어 서술한다. 역사서술인 동시에 아름다운 질주 장면을 담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글이었다. 진리도 일반론도 없는, 허망하고 험난한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까. 폴 벤느처럼, 포장은커녕 아무도 밟지 않은, 아니 길도 아닌 곳을 신나게 질주하면서 살면 되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