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제목[과학읽기] 기지와 미지 사이를 여행하는 실험자 <초월하는 뇌> 2026-01-2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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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뇌> 4장 5장


기지와 미지 사이를 여행하는 실험자


뇌는 많이 잊도록 설계되어 있다. 항상 절약 모드로 움직인다. 전혀 특별하지 않고 평범한 일은 기억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 강렬한 감정과 연결된 것, 아주 황당한 조합일 때 뇌는 그것을 기억에 저장시킨다. 인간은 경험하지만 모든 경험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일상의 어떤 경험들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다. 경험하지만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초월하는 뇌> 4장 5장에 등장한 정보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스팬드럴, 바이오필리아, 창의적 초월 등의 단어가 얼마나 각인되어 있는가? 책을 읽으며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여기에 등장한 모든 단어, 모든 문장은 그저 까만색 글씨에 불과했을 것이다. 


읽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한 켠에 적어놓았다든가, 중요 내용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요약해놓았다든가 했다면 조금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몇 일이 지난 후에 <초월하는 뇌>에 어떤 내용이 있었지? 라고 떠올리면 생각나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이렇게 문장으로 옮기고 있다. 일종의 ‘주의’로 각인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읽은 책을 또 읽거나 본 영화를 또 보는 일을 잘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읽은 책을 또 읽고 본 영화를 또 본다. 왜냐하면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에 다른 책을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책과 나 사이에 무궁무궁한 우주가 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무한한 우주가 있다. 이처럼 내가 더 큰 존재와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이 책은 이와 같은 ‘영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담고 있다. 


<초월하는 뇌>의 저자는 ‘영성’을 자연·우주·타인과 연결된 느낌, 자신보다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 경외감의 경험 등으로 정의한다. 지금까지 ‘영성’은 신과 종교의 영역을 가늠하는 개념이었다면, 저자는 비종교적이고 진화적인 관점으로 영성을 논하고자 한다. 


인류에게 영성은 생존상 직접적인 이점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이점을 가져다 줬다. 예를 들어 시를 쓰는 능력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진화적 이점이 없지만 소리와 리듬에 대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부산물일지 모른다. 이런 감수성은 실제로 생존상의 이점이 있을 것이다. 영성이 바로 이런 부산물이다. 


영성 출현의 원동력은 자연과의 원초적 친화력, 협동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 임박한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생물학적이며 심리학적인 것들이다. 


심리학자들은 자연 유대감 척도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자연과의 유대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양심적이고, 외향적이고, 쾌활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진화의 힘은 우리에게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을 심어주었듯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과도 연결된다.


경외감을 느끼는 데 필요한 능력 중 하나가 세상에 대한 개방성이다. 개방성을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 세상에 열려 있다는 것은 세상에 우리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 우리보다 큰 것,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가 영성 개념 중에서 주목하는 것은 ‘창의적 초월’에 관한 것이다. 그림, 작곡, 시, 새로운 아이디어, 과학적 발견, 방을 장식하는 방법에 대한 갑작스러운 통찰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지.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진 몰입의 상태. 창의적 초월의 순간에는 자아감, 몸,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 느낄 수 없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도 자신의 창작 과정을 이렇게 썼다. “소설가의 가장 큰 소망은 최대한 무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소설을 쓴다고 상상해 주면 좋겠네요.”


영성의 경험이 종교적 체험과 유사하기 때문에 유물론자들이 얘기하기에는 비과학적으로 들린다. 신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가 ‘창의적 초월’이라는 경험조차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이유일 거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신비’는 아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마법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모르는 것에 대해 열려있는 태도, 지나간 것에 대해 다시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 한계짓지 않고 무한 가능성을 묵도하는 것.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를 여행하는 실험자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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