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그의 사유, 그의 인격》 9장 푸코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가? 노동 계급을 좌절시키는가?, 10장 푸코와 정치, 11장 사무라이의 초상 진리와 선, 정상성의 토대를 의심하는 푸코에게 동시대의 많은 지식인이 우려와 거부를 표현했다. 벤느가 보기에 회의주의자인 푸코 입장에서 기성 질서를 비판하는 일은 당연했지만, 진리에 복종하는 이들에게 이 비판은 그 자체로 위험이자 위협이었다. 그들은 진리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푸코 같은 회의주의자들이 진리의 토대를 의심할 때는 진리라는 환상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벤느는 이 믿음이 진리에 대한 믿음과 달리 회의주의자 내부에서 분열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진리의 다른 이름인 환상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그 환상에는 진보나 정의도 포함된다. 푸코에게 진보는 환상이며, 단지 담론의 변화와 단절을 의미할 뿐이다. 노예제 폐지나 식민지 독립, 인권의 확대 같은 구체적 사안들도 마찬가지다. 푸코의 반대자들에게 이 문제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공산당 및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가 그랬다. 당대의 많은 좌파들처럼 푸코 역시 공산당에 가담했으나, 곧 거리를 두었다. 동성애자로서 느낀 불편함과 함께 스탈린 체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입장 차가 컸기 때문이다. 벤느가 보기에 푸코는 전투적 행동주의자였으나, 진리나 교리를 전투적 행동의 근거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학은 설교하지 않는 정치학이었다. 계보학적 역사는 모든 제도가 자의적이며, 확실성이 무상함을 폭로한다. 정치적 저항은 철학적 질문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푸코는 정치적 행동을 위한 처방을 경계했다. 진보나 정의를 믿지 않는 푸코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역시 하나의 교리로 보였다. 푸코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노동 계급을 좌절시켰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난한다면, 그들의 사상이 교리에 불과했음을 털어놓는 셈이 아닌가. 행동 강령을 제시하는 일을 철학자와 지식인의 역할로 보지 않는다면,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칸트의 ‘비판’ 작업에 주목하면서, 푸코는 철학을 ‘사유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작업’으로 보게 된다. 푸코가 보기에 칸트는 자기 시대가 과거와 다른 지점을 말하려 했으며, 칸트의 ‘계몽’은 곧 ‘비판’이었다. 차이를 읽어내는 일, 이는 우리 인식의 역량이자 한계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164쪽) 칸트를 계승하는 푸코는 ‘비판’을 통해 칸트의 ‘인간학’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벤느가 단언하듯, “철학에는 인류를 절망시킬 힘이 없다.”(156쪽) 혹여 누군가 절망한다고 해도, 절망이 진리만큼 인간을 죽일 힘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푸코는 인류를 위한 철학이나 정치를 믿지 않았다. 푸코에게 지식은 언제나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이다. 푸코는 자신의 정치적 행동이 개인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며, 이 개인적 문제는 결국 신체에 근거한다. 투쟁은 대의보다 정체성의 문제였다. 푸코에게 “지식인은 양심의 인도자가 아니”었다.(172쪽) 지식인의 ‘진실 의지’는 권력의 도구, 프로파간다가 되기 쉽다. 푸코는 사람들의 행동 방향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으며, 다만 사람들의 행동을 확인한다고 생각했다.(171쪽) 후반으로 갈수록 푸코의 작업은 ‘도덕의 이행’ 과정에 집중된다. 개인적인 윤리를 추구했던 서양의 고대에서 기독교로 넘어가면서 도덕은 어떤 규칙 체계에 대한 순종으로 이행한다. 푸코는 이후 기독교의 영향력 약화를 설명하며, 도덕의 부재에 대한 대응으로 존재의 미학을 언급한다.(175쪽) 물론 이 ‘존재의 미학’ 역시 보편적 형태가 아니며, 푸코의 ‘연장통’에 도움을 받아 개인들이 연마해야 할 기술일 뿐이다. 특히 푸코에게는 글쓰기가 존재의 미학을 구현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는 책들을 구성하면서 그 자신을 구성했다. 그에게 자신이 이미 쓴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끝없는 과업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184쪽) 존재가 완결되지 않는 미학의 대상이듯, 글쓰기도 끊임없이 자신을 구성하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내가 쓴 것에 흥미가 없다. 흥미 있는 것은 내가 앞으로 쓸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이전과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185쪽) 푸코에게 ‘다르게 사유하기’가 철학적 작업이라면, 글을 통해 변화하는 과정은 ‘존재의 미학’을 형성하는 실존적 철학의 과정이다. 완성도, 구원도, 바깥도 없는 과정. 벤느는 이 계속되는 작업이 탈주이자, 자기를 집어삼키는 작업이라 표현한다. 이 작업은 실수나 무지, 오인도 집어삼킨다.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실수나 무지, 오인에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이런 식의 탈주뿐일지도 모른다. 쓰고 말하는 일은 그런 실수나 무지, 오인을 용기 있게 감내하는 일이며, 계속 쓰는 일만이 부끄러움을 넘어설 용기를 주게 되는지도. 이제 자상한 벤느의 이야기는 끝났다. 벤느는 오래 미뤄둔 숙제를 꼼꼼하게 마무리하듯 자신이 기억하는 푸코의 모든 순간을 털어놓으려 한다. 역사학자의 세밀한 묘사 속에서 푸코는 기뻐하고, 화내며,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의심 속에서 살아간다. 벤느를 통해 푸코는 어떤 대의명분보다 자기 신체에서 비롯된 관점으로 세계를 보려 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푸코의) 철학에는 인류를 절망시킬 힘이 없다. 애석하게도 푸코의 연장통이 그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다. 다만 절망한 몇몇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 정도는 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