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던지고 침을 뱉겠다고?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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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夕) 부르는 소리(口), 이름을 뜻하는 한자 ‘명名’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어두워 상대를 분간할 수 없을 때, 이름은 존재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이름’이란 까마득한 옛날부터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름에는 이런 질문이 함께 섞여 있다. ‘너는 누구냐?’

공자는 이름과 존재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정명正名’이다. 그렇게 이름과 존재가 서로 들어맞는 것을 일러 ‘명실상부名實相符’라 한다. 여기서 이름과 짝을 이루는 것이 ‘실實’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실’이란 열매를 말한다. 속이 꽉 찬 것. 속알맹이에 따라 언제든 이름은 바뀌어 불릴 수도 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최근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새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한다. 이 낡은 책을 다시 세상에 내어 무슨 이득이 있으랴만 구닥다리를 모으는 취미도 적잖이 고상한 취미인 바 영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다. 구닥다리라 하는 것은 책의 이름에서 낡고 부패한 냄새가 나는 까닭이다. 목민牧民이라니! 

‘목민’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말이다. 목축牧畜이라는 말을 보라. 목민이란 백성을 기르되 짐승처럼 여긴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 책을 고이 반기는 사람이 있으니 대체 어떤 시절을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하긴,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해야 한다던 모씨가 얼마 전 복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그가 있는 곳이 교육부라지. 개돼지니 가르치고(敎) 길러야지(育). 21세기에도 ‘목민’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목민’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목사들이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그래도 개돼지가 아니라 양을 기르는 것이니 고상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 헌데 실상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인류 역사에서 양이 중요했던 까닭은 의衣와 식食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털과 고기를 취하기 위해 양을 길렀다.

오늘날 목사들은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아 양떼, 신도들을 사고팔기도 한다. 신도 머릿수로 교회가 매매된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래도 요즘 양심 있는 목사들은 ‘매매’ 보다는 ‘증여’를 선택한다. 대표적으로 명성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요즘 ‘세습’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명성이 자자하다. 헌데 사정을 보면 세습보다는 ‘증여’라는 말이 어울린다. 아버지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교회와 신도를 증여.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양심이 선택한 말은 ‘승계’였다. “내가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승계했더라고 그렇잖아요.”(7월 29일 설교) 이런 것을 보면 모름지기 지혜로운 자들의 말을 배워야 한다. 이 탁월한 말은 자연스레 모 재벌의 승계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암, 명성교회의 이름도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야지. 헌데 승계 목사, 김하나님은 또 누구에게 승계하려나? 먼 미래지만 자못 궁금하다.

목사 김하나님이라니, 누군가 발끈하며 성낼지 모르겠다. 이름을 불경하게 부른다며. 그러나 무릇 목사에게는 ‘님’자를 붙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꼭 기억하고 곱씹어 소리 내어 읽어볼 일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승계했듯 아들 목사 김하나님도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했다’고. 

‘님’이라는 호칭을 보니 한 사건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한 친구와 언쟁을 벌였다. 무슨 까닭에 언쟁을 시작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목사님’이냐 ‘목사’냐를 두고 다투는 일로 번진 것만 기억한다. 그때 나는 ‘그런 목사 따위’라는 식으로 말을 뱉었고, 그 친구는 ‘목사님을 목사라 부를 수는 없다’며 맞섰다.

10년이 훌쩍 넘어 그 날을 돌아보면 그때 고집스러운 태도가 자못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목사님, 목사님을 외친 그는 결국 목사님이 되었다. 한편 나는 ‘님’자가 붙는 자리는 도무지 넘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학창 시절 ‘교수님, 교수님’이라 했어야 했는데… 이 교수는 어떻고, 저 교수는 어떠니 해댔으니 이 모양 이 꼴이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했으니 모교 목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모교엔 대학교회가 있고 당연히 이 양떼를 기르는 목사도 있다. 헌데 이 목사는 작년 5월 ‘동성애와 동성애 결혼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라는 글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이렇다. 동성애는 나쁘다. 왜? 성경에서 그랬으니까. 게다가 병처럼 해롭다. 그러니 인권을 위해 동성애를 치유하자.

나아가 목사는 대학교회 설교에서 암과 곰팡이를 도려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암과 곰팡이, 몸을 썩고 병들게 만드는 자들이 있으니 내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지목한 것은 페미니즘 강연으로 징계를 받은 모 학우 등이었다. 이쯤 되면 ‘나를 기르시는 목자’가 아니라 ‘나를 가르시는 목자’라 해야겠다. 

성경의 언어로 목사의 말을 번역하면 이렇다. 침을 뱉고 돌을 던지자. 무엇으로? 바로 신의 이름으로! Bismillah!! 널 결코 놓아주지 않으리라! We will not let you go!! 왜?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바로 신의 이름으로! Bismillah!! 만약 우둔한 법정이나, 폭악스러운 인권위 따위가 없었다면 분명 침을 뱉고 돌을 들어 쳤을 것이 분명하다. 공동체를 위해! 신의 이름으로! Bismillah!!

목사라는 자가 앞장서 학우를 쳐내는 이 일을 어찌 보아야 할까. 허나 오래된 전통을 보면 영 잘못된 일도 아니다. 목사의 조상, 목자는 다르게 보면 목축업자였고, 또 그들은 한편으로 도축업을 겸하기도 했다. 목사가 목축을 사고팔며, 도축하는 일이 뭐 이상한가. 그들의 입에서 피비린내가 난다면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일이기도 하다. 

So you think you can stone me and spit in my eye? 돌을 던지고 침을 뱉겠다고? 그래. 저들은 언제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이미 손에 돌을 굴리고 있으며 가슴에 품은 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암, 무릇 목사란 아둔한 무리를 배불리 먹여서는 가죽을 벗기고 살을 취하는 이 아닌가. 행여 목사라는 말이 낡았지만 버리기 아깝다면 이렇게 부르자. 탐욕스럽기에 ‘먹자’, 혹은 남을 해치는 도살의 전문가이기에 ‘도사屠師’가 어떤가.

물론 말을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감추인 실상이 드러나고 숨겨진 것이 알려진다 해도 늘 껍데기 같은 이름으로 제 모습을 꾸미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수도 말하지 않았나 미혹케 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의심 나면 눈을 부릅뜨고 물어볼 일이다. So you think you can stone me and spit in my eye? 나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겠다고?

손에 감춘 돌이 언뜻 보이거나 가슴에 품은 칼날이 번뜩이면 이렇게 말해야지. Oh, mamma mia, mamma mia.

기픈옹달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