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것도 아닌, 복수

너 죽고 나 죽자!

누군가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복수의 대상인 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적이 원하는 게 내가 죽는 것이라면 안 죽는 것이고, 못 살기를 바란다면 별일 없이 사는 것이 복수다. 복수에 대한 시를 좀 보자. 『들풀』에 나오는 복수 시리즈 둘 중 「복수」 1.

그렇지만 그 둘은 마주 서 있다. 광막한 광야에서 온몸을 발가벗고, 비수를 들었다. 그렇지만 보듬을 생각도 죽일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인다. 행인들은 이리하여 무료함을 느꼈다…두 사람은 그 가운데에서,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메마르게 서 있다. 죽은 사람 같은 눈빛으로, 행인들의 메마름을 감상한다. (『들풀』, 「복수」, 그린비, 38쪽 인용)

   

광야에 비수를 든 벌거벗은 두 남녀. 구경꾼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없다. 구경꾼들의 바람은 이들이 보듬거나 죽이거나 치정극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서로 물어뜯고 피를 흘리겠지? 빨리 무슨 일이든 좀 일어나라구. 하지만 구경꾼이 원하는 피의 대살육은 일어나지 않는다. 구경꾼들이 무료함을 느끼다 흥미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면 이제 두 남녀의 복수는 완성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빌라도가 묻는다. 진정 이 사람을 죽이길 원하는가. 군중이 소리쳤다. 그를 죽이라.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은 몰약을 탄 술을 마시려 하지 않는다. 몰약을 마시면 자신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똑똑히 볼 수 없으므로. “그들의 앞날을 가엾어 하고 그들의 현재를 증오하기 위해” 손과 발의 아픔 속에서, 그는 슬픔과 환희를 동시에 느낀다. 복수에 관한 두 번째 시 「복수」 2에서 예수의 복수는 피 흘리고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의 아들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피에 영원한 죄책감을 남기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두 남녀의 복수나 예수의 복수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복수의 대상만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원한에 가깝다. 원한은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마음속으로 하는 분노 같은 것이라면 복수는 행위를 진행시킨다. 원한과 복수의 다른 점은, 둘 다 어떤 행위가 따른다 해도 복수에는 ‘자기 살해’가 있다는 점이다.

원한은 ‘너 죽고 나 살자’다. 복수는 ‘너 죽고 나 죽자’의 방식이다. 이 둘의 차이는 자기 살해. 자기 살해는 복수의 윤회를 끊는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복수의 대상만 죽는다. 두 남녀의 경우, 복수는 구경꾼의 바람을 메마르게 하고 그들과 함께 자신들도 메말라가는  것이다. 예수의 복수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임을 스스로의 죽음으로 증명한다. 복수의 주체인 ‘나’를 죽이지 않으면 다른 구경꾼, 다른 유대인을 만나면 다시 피의 대살육이 반복된다. ‘너 죽고 나 죽자’ 방식이 원한이 아닐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복수들은 “생명고양의 환희”라는 알 수 없는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나도 죽고 너도 죽고 그도 죽는다

루쉰의 『새로 쓴 옛날이야기』의 「검을 벼린 이야기」도 복수 얘기다. 주인공 미간척의 복수역시 자기 살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왕이라는 걸 알게 된 청년 미간척. 그 소식을 들은 왕은 자객을 보내 미간척을 죽이려 한다. 일이 이렇게 되면, ‘너 죽고 나 죽자’의 루쉰식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된다. 도망가도, 여기서 잡혀 죽임을 당해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길은 영영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미간척은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더니 등에 진 푸른 검을 뽑으면서 그대로 뒤에서 앞으로 자신의 목 뒷덜미를 한칼에 내리쳤다. 두개골이 땅바닥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는 그 순간, 그는 검은 사람에게 검을 넘겼다. (『검을 벼린 이야기』, 그린비, 374쪽 인용)

복수의 대상인 ‘너’를 죽이고, 복수의 주체인 ‘나’도 죽는 것. 이것이 루쉰식 복수라 했다. 여기에 하나 더. ‘그’의 죽음이 등장한다. 지금 미간척의 복수는 불발로 끝날 위기상황. 그러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떠난 길에서 만난 생명부지의 검은 사내로부터 들은 이상한 이야기는 미간척의 딜레마를 깨끗이 해결하고 있다.

“총명한 아이야 잘 들으렴. 내가 얼마나 원수를 잘 갚는지 너는 아직 모르지.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이기도 하단다. 내 영혼에는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가 있단다. 나는 벌써부터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단다!” (같은 책, 374쪽 인용)

이 이상한 이야기는 한마디로 복수를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 그 이유는 “너의 원수가 곧 나의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 검은 사내 자신이라는 거다. 너의 원수가 나의 원수가 되려면 다른 사람인 미간척이 곧 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왜 다른 사람이 곧 나인가. 혹시 이것은 불교의 연기적 관계 때문? 연기적 관계는 대립 이항적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은 미움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너’와 ‘나’에서 ‘나’가 있으려면 ‘너’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성의 사유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지운다.

   

불교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같은 시대 속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의 책임은 어느 누구 한사람인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미간척의 복수라는 사건도 미간척 개인의 일이 아니다. 미간척의 아버지를 죽인 왕의 욕망과 그것에 알게 모르게 동조한, 혹은 구경한 동시대의 도그마 속에 ‘나’ 또한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에 대한 통렬한 자각은 ‘미간척’과 ‘검은 사내’라는 개별적 자아를 넘어 생명 공동체 속에서 솟아나온 공감의 연대를 형성한다.

그의 머리는 물로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왕의 머리에 달려들어 왕의 코를 한입에 물었다. 거의 빼낼 것 같은 기세였다. 왕은 참지 못해 “아이고”하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미간척의 머리는 이 틈을 타 빠져나왔고 얼굴 방향을 바꿔 왕의 아래턱을 죽을힘을 다해 물어뜯었다.(같은 책, 384쪽 인용)

이보다 더 그로테스크할 수 없다! 커다란 솥단지 안 빙빙 도는 세 개의 머리. 미간척과 왕, 그리고 지금 막 스스로의 머리를 칼로 내리친 검은 사내의 머리까지 세 개의 머리가 뒤엉켜 왕을 물고 뜯다, 종국에는 누가 누구의 머리인지 형체도 알 수 없게 사그러진다.

마침내 루쉰이 말한다. 이것이 복수다. 복수는 너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도, 나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복수의 완성에는 ‘그’의 죽음이 필요하다.

살아라 생명의 명령이다!

‘그’의 죽음은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미간척 이야기에서의 공감은 적에 대한 공감이다. ‘너’의 적에 대한 ‘나’의 공감이 복수의 토대다. 미간척과 검은 사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아무리 미간척의 원통함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검은 사내가 미간척의 복수를 대신해줄 명분은 없다. 왕에 대한 복수라는 테마 속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둘은 어떠한 공통감각도 없이 만나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와 ‘너’의 복수는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복수다. ‘너 죽고 나 살자’의 원한의 방식이든, ‘너 죽고 나 죽자’의 자기 살해의 방식이든,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체와 대상의 사건에 대한 에티튜드다. 그러나 ‘그’가 끼어든 복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우리는 경험이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월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 순간 모두 검은 사내였다.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어린 미간척과 같은 종류의 분노가, 그런 공감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기어이 왕을 끌어내렸다. 이제 복수는 사적인 차원의 일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미간척과 검은 사내, 왕의 머리는 세 개의 에고를 뜻한다. 루쉰식 복수는 솥단지 속 세 개의 머리가 사라지는 순간, 그제서야 완성된다. 검은 사내의 공감마저 형체도 없이 싹 다 사라져야 소멸이다. 복수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복수 그 자체마저 사라지는 소멸의 순간 부르는 검은 사내의 사랑타령. “아아 사랑이여 사랑이로구나….아하 오호라, 오호 오호 사랑이여 오호라, 오호라 아호.”(같은 책, 380쪽 인용)

   

복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그의 것도 아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복수. 복수마저 사라지는 복수의 끝에 생명고양의 환희, 사랑이 있다. 적도, 나도, 그의 공감도, 공감한다는 사실 자체마저도 사라진 자리에서 복수의 윤회는 끊어진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의 복수는 없다?

천만의 말씀. 복수가 한번 뿐인 일은 없다. 다시 다음 순간 다른 적, 다른 전장이 그어지기 마련이다. 그럼 그때 또다시 투창을 들면 된다. 투창을 들고 싸우다 복수가 소멸하고 다시 생성되면 다시 싸우다 소멸하고. 뭐가 문젠가. 이게 삶인데. 전장이라는 말에 비장해질 필요도 없다. 어쩌면 루쉰이 살았던 100년 전 시대보다 지금이 전쟁 상황인지 모른다. 아니, 전쟁을 넘어 헬이다. 지옥은 외부의 상황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내면의 상황이기도 하다. 루쉰의 “세 개의 머리”는 내 안의 굳건한 세 개의 에고에 대한 자각이다.

루쉰의 투창은 외부를 향해서만 아니라, 자신에게로도 향해 있다. 적을 적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기에. 복수의 소멸 후,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희망과 기쁨 같은 좋은 게 아니더라도, 아니, 좋은 게 아니기에 삶은 계속된다. 사건의 연속을 일상으로 살아내는 것. 생명은 이런 거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살아라. 생명의 명령이다.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이대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아름다운 사랑과 연대의 복수 이야기는 이런 결말을 앞두고 있다. 어떤 게 왕의 두개골이고 어떤 게 미간척과 검은 사내의 두개골인지 구별할 수 없던 대신들은 회의 끝에 세 개의 머리를 왕과 함께 묻는다. 시간이 흘러 장례식 날. 깃발을 든 의장대와 나팔 부는 군악대 그리고 시끌벅적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 넘실넘실 다가오는 세 개의 머리와 하나의 몸뚱이를 실은 금관. 왕을 죽인 대역죄인의 머리통 앞에 어쩔 수 없이 절을 해야 하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상황.

혹자는 울고 혹자는 우는 척하고, 혹자는 슬퍼하고 혹자는 슬픈 척 하는 표정들 뒤로 장례 행렬은 뒤죽박죽된다. 장례고 뭐고 백성들은 더 이상 관심 없다. 이들에게 왕의 죽음과 그 배후인 복수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백성들은 왕의 죽음 앞에서 시크하던 이모셔널하던 간에 각자 제 갈 길로 간다. 자신 앞의 금관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아떤 목숨줄의 사연이 있는지 무관심한 채.

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온갖 좋은 정의로운 말들이 적의 무기가 되는 곳. 그곳은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이 말은, 세상을 바꾸는 미세한 힘은 혁명의 위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한 끗 차이로 전혀 다른 방식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특정 계급의 권력만이 전사를 맥 못추게 하는 게 아니다. 복수의 소멸 뒤 찾아온 이상하게 태평하고 평온한 세상.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거다. 때문에, 이번에는 전선이 다르게 그어진다. 적과 전장은 매번 바뀐다. 그리하여 매번의 투창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좋은 것만 생각하라고. 나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루쉰의 연구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글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마지막 문장이 눈을 찌른다.

백성들은 더 이상 그들을 구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