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가 가나안

[ 기픈옹달 ]

:: 경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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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이 책의 이름이 대관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이를 한자로 쓰면 ‘出埃及記’이며 출애급기가 되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애급’이 ‘애굽’이 되었다. 하느님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부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겠지 뭐. 여튼 여기서 ‘애급埃及’이란 중국어로 ‘아이지Āijí‘, 이집트를 일컫는다. 이집트가 ‘아이지’가 되고 이를 한자음 애급으로 읽어, ‘애굽’이라는 기묘한 말이 탄생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이집트를 ‘아이지’라고 한다. 헌데 우리는 애급이건 애굽이건 당최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출애굽기>가 마치 신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바로’라는 악독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전설의 나라 ‘애굽’을 벗어나는 이야기라고. 애굽이 이집트이니, 바로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쉬이 알법하다. 바로 이집트의 통치자 파라오Pharaoh.

따라서 <출애굽기>라는 정체불명의 제목보다는 가톨릭 쪽에서 사용하는 <탈출기>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다. 엑소더스Exodus, <탈출기>의 영어 제목은 이 탈출이 몇몇 개인의 일탈이 아닌 집단적인 공동 행동이라는 점을 일러준다. 파라오, 신의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광야로 발을 내딛기로 한 무리들!

그런 의미에서 기존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가나안’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은 적절하다. 가나안이란 이집트 제국을 탈출한 민중이 향하는 곳이며, 그들에게 약속된 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꽤 절묘한 선택인 듯싶으나 그 뿌리를 찾아보면 영 엉뚱한 이유가 튀어나온다. 가나안,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들을 부르기 위해 그냥 붙인 말인 셈.

말의 연원이야 어쨌든 간에 <탈출기>는 계속 쓰이고 있다. 교회와 목사의 신성한 권력으로부터의 탈출! 엑소더스, 이 집단적인 움직임은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안나가 가나안’을 외치며 교회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이 꽤 늘어난 까닭이다. 이러니 높으신 분들의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그런데 당혹스런 사건이 벌어졌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가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10년 전보다 100만 명 이상 늘었단다. 덕분에 불교를 꺾고 대한민국 최대 종교라는 명예로운 이름도 얻었다. 

조사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인구가 감소했다. 게다가 종교인보다 비종교인 수가 많아졌다. 이른바 세속 사회의 문이 열린 것. 헌데 기독교는 홀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Hallelujah! 가나안으로 탈출한 머릿수보다 갑절로 많은 결실을 맺은 결과다. 차고 넘치게 채워주시는구나!!

그런데도 교계는 고민이 많다. 왜? 각 교단마다 교인수가 줄어서 걱정이란다. 모든 교회마다 교인이 줄어서 아우성이다. 그래서 손뼉 치고 환호할 일이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하다. 통계가 잘못된 게지. 아니, 믿음을 상실해서야 되겠는가? 불신의 영을 내쫓고 믿음을 회복하자. 따져보면 이미 교회 전통 속에 이 기묘한 현상을 해석하는 말이 있지 않나. ‘경건한 이방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방인, 비록 다른 무리에 속해 있으나 경건함,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10년을 곱씹어보면 이런 상황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교회가 말한 ‘경건’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자. 

10년 전, 대형 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왔으나 ‘신화는 없다’며 그것이 모두 믿음과 노력의 결실임을 주장했다. 암, 믿고 땀 흘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니. 그에게 내려진 축복이야 말로 경건의 증거였다. 그는 경건의 증거로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기도 했다. 그를 나라의 우두머리로 삼았으니 이 조국을 축복하시리라.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로도 권사도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가졌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많고 많으니 접어두자. 다만 ‘창조경제’라는 창조적인 말을 내놓은 것을 보면 그도 창조주를 섬기는 이가 틀림없다. 그러니 그를 기리는 자리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가, 성조기와 다윗의 별이 나란히 등장했지. 둘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 아닌가? 

그러니 광장이야 말로 지난 10년 차곡차곡 쌓아둔 교회의 경건이 빛을 발하는 자리이다. 태극기와 십자가, 성조기와 다윗의 별이 교차하는 그곳이야 말로 경건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곳에는 빨갱이도, 동성애자도, 난민도 없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향한 열열한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 구태어 교회에 갈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곳이 성전聖戰의 현장이며 성전聖殿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곳인데. 그러니 그들은 또 다른 교회 밖 기독교인이라 불러야 할 테다. 

지난 10년 교회가 선포한 경건의 메시지는 경건한 이방인의 영혼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이 타락하는 세상을 세상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경건에 목마른 이들에게 샘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혐오하고 배척하며 손가락질하라. 여성을, 동성애자를, 난민을, 소수자를! 이 감동적인 메시지는 수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교회와 목사의 가르침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광장과 거리의 구석구석까지,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리라. 그러니 걱정은 접어두자. 비록 헌금은 적게 들어와도 기독교의 경건함은 더욱 드높이 날릴 터이니.

<탈출기> 이야기로 돌아가자. <탈출기>는 가나안 정복기로 이어진다. 제국을 탈출한 난민들이 선주민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 비극이 수천 년 지난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정복한 그 땅이 과연 가나안인지 모르겠다. 성서에 따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다. 살육으로 피가 흐르는 땅은 아닐 것이다. 

기묘하게도 경건한 이방인들은 가나안을 정복했듯 이 땅을 정복해야 한단다. 이방인, 더러운 것, 음탕한 것을 몰아내고 정결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해야 한단다. 허나 역시 그것이 가나안인지는 모르겠다. 도리어 가나안이란 탈출 이후에 직면하는 해방의 땅이 아닐까? ‘안나가 가나안’이야말로 차라리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신비가 일어나는 땅일 테다.  

그러니 다시 한번. 경건 따윈 집어치우고 이렇게 외치자. 

안나가 가나안!

기픈옹달

독립연구자.
黥치는 소리 혹은 經치는 소리, 
아니면 磬치는 소리 뎅뎅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