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² 되기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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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글렀어요

이 이야기는 쓸쓸하고 적막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벌써 제목에서부터 체념과 회환의 기운이 서려있지 않은가 왜. 내가 다소 과장된 ‘글렀다’는 표현을 쓴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무료와 환멸. 요 근래 내 상태다. 무료는 아내와 엄마 역할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왔다. 일종의 적적함이 울적함이 된 경우다. 환멸은 이런 저런 일로 인해 인간에 더 이상의 기대 없음을 입증하는 상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원인을 가지고 관계에 대한 가치가 무너진 현재 내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함을 전제로 오늘 할 얘기는 ‘적막’에 대해서다.

요즘 꽤 적적하고 적막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허무하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상실감과 글쓰기에 대한 재능도 애매하다는 체념으로 인해 현재, 시달리고 있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번 생은 글렀어요.

 

아무 쓸모없음

“이런 걸 베껴서 어디다 쓰려고?” 어느 날 밤, 그는 내가 베낀 옛 비문들을 넘기면서 의혹에 찬 눈길로 물었다. “아무 소용도 없어.”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아무 의미도 없어.” (『외침』,「서문」, 그린비, 26쪽 인용)

1916년 5월 6일의 루쉰도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을까? 샤오싱 출신의 베이징 학사로 사용된 샤오싱 회관에는 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래 전, 한 여인이 목을 매고 죽었다고 전해지는 홰나무 때문인지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외딴 방 안, 루쉰이 무언가 쓰고 있다. 그를 찾아온 친구가 묻는다. “이런 걸 베껴서 어디다 쓰려고?” ‘이런 걸’의 이것은 “아무 데도 쓸데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비문(碑文) 베끼기였다.

베이징 교육부 2과 과장, 공무원 루쉰은 왜 비문 베끼기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 밖에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1912년 루쉰이 처음 베이징에 도착해서 첫 출근을 하던 날을 살펴보자. 그는 그 날의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신해혁명 이후 전시행정 뿐인 공무원 생활과 뒤이은 위안스카이 폭정 속에서 루쉰이 선택한 “마비”와 “죽은 척”은 비문 베끼기였다. 그의 선택은 비문 베끼기였지만, 그가 선택하지 못했던 것은 7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무료와 환멸의 긴 터널을 지나는 방식으로 루쉰은 마비와 죽은 척을 택한다. 마비와 죽은 척은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던 시기를 통과하는 루쉰만의 방식이었다. 비문(碑文)은 오래된 비석에 쓰인 고문인데, 워낙 옛 한자에다 그 양도 빽빽이 많아 루쉰같이 공부 좋아하고 할 일 없는 사람들에겐 시간 때우기로 안성맞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만 피스짜리 퍼즐 맞추기랄까.

7년이라는 시간은 생각하기에 따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인생 전체로 놓고 보면 7년은 길지 않은 듯 느껴진다. 하지만 당장 매일 무언가를 하는 시간으로서의 7년은 광장한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재능은 타고난 무엇이 아니라, 매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재능이 있어서 매일 하는 게 아니다. 매일 하는 것이 재능이다. 그런 면에서 루쉰은 훌륭한 능력자임에 분명하지만, 재밌는 것은 그의 ‘매일’을 길어 올리는 원동력은 그를 곤란에 빠뜨린 ‘적막’이라는 사실이다.

 

적막과 일상

집안의 가세가 기운 15세부터 중년이 다 되가는 이 날까지 되는 일 하나 없고, 아무리 이것저것 해보려고 몸부림쳐 봐도 ‘무플’인 상태는 “나날이 자라나 독사처럼 그의 영혼을 칭칭 감았다.” 적막을 떨쳐내려는 루쉰의 “절망적 항전”이 비문 베끼기다.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아무 소용도 없는 짓. 무려 7년간의 비문 베끼기는 적막 때문에 가능했다. 사방이 가로막힌 적막 상태라 비문을 베꼈는데, 비문 베끼기는 루쉰의 일상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알았다. 그걸 내가 하고 있고 하려 한다는 것을. 현재 내 상태를 진단하자면 일종의 폐허다. 뭔가 “지나갔고 지나가거나 지나가려”하고 있다. 지나가는 것에 방점을 찍으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 지나가는 것들이 있다면 다가오는 것들도 있다. 다가오는 것들이 희망찬 일이 아닌, 노년, 불안, 병, 죽음이라도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질문 앞에 섰다. 이런 것들 속에서 이런 것들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더 이상 젊지도 않고 더구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중띤 글을 써야하는데.

누가 불러주는 대로 신들린 듯 쓰는 천재가 아닌 이상, 앞으로도 어중띤 글을 계속 쥐어짜듯 써나갈 예정이다. 글의 운명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생각과는 영 딴판이다. 내가 생각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문장이 문장을 끌고 나간다. 이미 실패의 글쓰기가 글의 운명인데 어중띠면 어떤가. 어중띤 글의 매력을 한껏 발휘 해야지. 일상은 사소한 것 하나 붙잡고 가는 거다. 믿는 건 미래의 희망이 아니다. 한줌의 힘을 믿는다. 오늘 쓸 한줌의 글이 밀고 가는 힘으로 삶은 살아진다. 꼭 글이 아니어도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하고 있는 그것. 그것이 삶이다.

 

여행이나 다니라구?

세상에는 허무 탈출을 위한 수많은 방법이 있다. 여행, 산책, 종교, 취미생활 등등. 이 말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이런 걸 할 수 있으면 이미 허무한 사람이 아니다. 뭐라도 좋다. 무기력한 와중에도 매일 놓지 않고 있는 그것, 아니, 무기력하기에 할 수밖에 없게 된 그 무엇은. 어쩌면 글은 심심풀이 땅콩처럼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료와 환멸은 일상을 파괴하는 수동적 힘이다. 무료와 환멸의 수동적 힘은 어느 순간, 능동적 힘이 된다. 비결은 일상이다. 적막과 일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적막이 전도되는 순간은 7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1²에게 목적은 없다. 거듭하는 행위인 1²의 과정이 다다. 1²되기. 앞서 친구와의 대화로 루쉰은 글을 써볼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의 첫 소설『광인일기』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옛날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적막을 일상으로 살아내는 힘은 여기에 있다. 목적이 있어서 사는 삶이 아닌, 사는 게 목적인 것이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진짜 쓸쓸하고 적막한 이야기로 끝날 뻔 했다.

2019. 3. 26. 무기력을 넘어서 미미 씀.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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