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育兒)를 끝내는 정신승리법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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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 줄을 넘어서니 친구들은 거의 대학생 엄마 이상이 되었다. 결혼과 출산이 약간 늦었던 나는 딸이 아직 고등학생이다. 친구들의 입에서 요즘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육아는 언제 끝나는 거니!”

대학만 보내면, 애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안달하며 보낸 십여 년만 끝나면, 저도 제 앞가림하겠지, 그럼 나도 애 일에서 놓여나 좀 편해지겠지, 했단다. 그러나 대학 입학은 그야말로 좀 굵다 싶은 선 하나를 넘은 것이었을 뿐, 애들의 취직도 문제고, 연애도 문제고, 결혼도 문제드라고. 그런데 그러그러한 지네들 일이 왜 아직도 내 일이냐? 한다.

그렇다. 대학도, 취업도, 결혼도, 지속되고 있는 삶 속에서는 모두가 그때 잠깐의 넘어설 선일 따름이다. 문제는 언제나 선에 다가가는 무수한 시간들 속에, 선을 넘어서고 나서도 계속될 그 시간들 속에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끝나는 법이 없다.

한 친구는 애인과 다투고 눈 빨개져 들어오는 딸을 보는 게 힘들다. 다른 친구는 갓 취업한 아들이 익숙지 않은 업무와 상사의 찌르는 눈빛에 오그라들어 축 쳐져 들어오는 게 가슴 아프다. 누구라고 살면서 쨍한 날만 있으랴, 삭이거나, 참거나, 술이라도 진탕 먹고 풀어버리거나 그러면서 넘어가고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안 그런다. 엄마를 붙잡고 사연인 즉 하며 시시콜콜 풀어댄다. 이럴 땐, 저럴 땐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으로 말이다.

아니, 엄마는 그 답도 준비를 해야 한단 말인가. 왜 네 문제를 엄마가 풀어야 하는가. 언제까지?

육아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키웠다. 스스로 문제해결 능력을 갖지 못하게 사사건건 먼저 나서서 아는 척했고, 해결해 주었고…, 그 결과일 뿐이다. ‘기다려줬어야 했다, 독립심을 키워줬어야 했다’는 충고는 다 키워 놓은 엄마들에겐 애기 때 그렇게 못한 것을 자책하는 것 밖에 할 것이 없는 답이다. 갓 된 엄마들에게도 어려운 숙제이긴 마찬가지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매순간 몸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독립심은 엄마의 끝없는 심리적, 육체적 노동을 갈아 넣고서야 가능하다. 아이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어디까지 두고 지켜볼 것이며, 어느 시점에 끼어들어 재제를 가할 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엄마는 무관심을 가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된 무관심은 촉각을 더욱 곤두세우는 일이므로, 무관심한 채로 쉬거나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아이가 상해를 입는다면 말할 것도 없고, 사고가 나지 않아도 마음껏 저지레치는 아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책임 추궁도 피할 수 없다. 심리적 갈등뿐인가, 기다려주는 동안 엉망진창이 된 집안 일 역시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아이가 잠들기까지 계속되는 심리적 갈등은 집착과 분열을 오가는 수준이며, 정리하고 치우는 노동은 끝이 없다. 육아 전문가의 지침에 회의적이게 되는 이유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을 한번 뒤집어보자. 이 상식적이고 관습적인 판을 들쑤셔놔 보자.

누구의 연애사에 대해, 직장 내에서의 갈등에 대해…, 그러니까 사람들에 대해, 관계에 대해 우리가 살면서 하는 얘기들이란 게 전부가 그런 거 아닌가? 차를 마시면서, 술자리에서 얼마나 우리가 사회에 대해, 이념에 대해, 산다는 것에 대해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나? 설령 그랬다 쳐도 이런 류의 대화를 하게 된 계기는 언제나 사람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 때문에 시작된 것 아닌가? 엄마와 자식 사이라서 저런 얘기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자식들의 저런 일들이 여전히 육아로 느껴지는 건 자식을 자식으로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자식은 자식이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고, 엄마는 엄마이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엄마라는 정체성에 가두고, 자식을 자식이라는 정체성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죽 해왔던 대화들, 친구들과 선후배와 연인사이의 화제였을 저 연애사, 직장 상사의 뒷담화 같은 것이 육아의 연장선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식이 개별 인격임을 인정한다 하여도 자식은 또 자식이 아닐 수 없다. 피를 나눠주었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도, 허다한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자주 대면하고, 일상의 공간이 제일 많이 겹치는 사람 하나, 그렇기에 같은 화제여도 친구 간에 나누는 것과 자식과 나누는 것은 같지 않다.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사랑스럽다. 감정이 종종 과하다. 그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

다만 우리가 육아의 그 끝나지 않는 고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엄마와 자식이라는 유일한 정체성의 울타리 안에 묶여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갔다 들어와도 되는 것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육아’라는 말을 내 사전에서 삭제해야겠다. 누가 누구를 키운단 말인가. 일방적으로 키우기만 한 적이 없음을, 내가 키워진 적도 많았다는 것을, 더 많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엄마들은 다 알고 있다.

새로운 공간에 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십여 년 전에 새로운 사람을 하나 만난 거다. 그 이름이 자식이다. 지나 온 시간 동안 여러 사건이 우리 사이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이다. 이 관계 맺음이 따라서 끝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자식 아니라 내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그럴 것이듯.

지니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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