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거짓이다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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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 인쇄되어 나온 것들, 책이나 신문에서 보는 모든 글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아니 신뢰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대로 믿고 외우고 사유의 근거로 채워 넣었다. 픽션이라고 대놓고 써놓은 이야기에서조차 일말의 진실을 찾아내어 신뢰의 장에 밀어 넣었다. 진실을 활자로 전하는 것이라 믿었던 저자, 철학자, 기자 등의 이름은 명예를 가질 만한 것으로 자동 분류됐다.

활자로 나온 것은 다 진실? 언제부터인가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여전히 활자를 통해 정보를 찾고, 근거를 메우고, 비판받아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지만 왕좌는 이미 빛이 바랬다. 균열을 감지한 것도 역시 활자를 탐구하면서다. 활자는 본인이 토해내고 있는 것들이 모두 진실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퍼스펙티브(Perspective)에 따라 다른 진실을 가리킨다고, 원본은 없고 복사본들만 있을 뿐이라고, 역사는 투쟁에서 승리한 권력자들의 기록일 뿐이라고, 소수의 수많은 진실들이 가려지고 묵인되었을 뿐이라고, 보편에 흡수된 특수는 활자를 가질 기회도 없었다고. 활자와 조금 친했을 때는 듣지 못했을 고백들이 친분이 긴밀해질수록 들리기 시작했다.

활자의 독과점이 끝난 시대, 누구나 활자의 무대에서 쓰레기든 기레기든 내뱉을 수 있는 시대적 흐름은 활자의 위상을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내재된 원리로 종말의 길을 간다는 주장처럼, 활자는 활자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오랜 왕좌의 자리에서 제 발로 내려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사람들은, 아니 나는 활자를 통한 지식과 정보에 시큰둥하다. 그렇다고 데면데면하던 그림과 영상에게 친구하자고 할 수는 없어서 활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가 늘 고민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다. “활자를 믿지 않겠다는 인간이 기어코 글쓰기를 삶의 무기로 삼고자 할 때, 이 인간은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장난스런 질문같지만 본인에게는 꽤나 고민의 두께가 깊다. 쪼개지지 않는 바윗돌을 맨발로 줄기차게 차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소설, 드라마, 작사 같은 도구들로 바윗돌을 차례대로 조준해봤지만 깨지지는 않고 오히려 부피만 키워놓은 형국이다. 아무런 도구 없이 맨발로 바위차기를 다짐한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상처투성이인 맨발에 얇은 양말이라도 신겨놓아야 하기에 오늘도 질문은 계속된다. 지치지 않고 무엇을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할지를 매번 묻게 되는 것은 차라리 축복이다.

최근 한 강좌에서 “숱하게 많은 글을 써냈으면서도 글과 문자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는 루쉰의 이야기가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왔다. 곧 절망이 될 것이 뻔하지만 잠시라도 붙들고 싶은 희망. 루쉰은 “자신을 믿지 않았고, 존재와 실재를 추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쓰기는 진솔하되 진리를 추구하지도 진실을 말한다고 자부하지도 않았다”고. 더 이상 활자를 숭배하지 않고, 어떤 대단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환상을 작살낸 후 만난 “나는 허위를 쓰고 있다”, “글쓰기는 거짓이다”라는 이 활자! 당장이라도 청동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싶어진다.

내가 쓰는 글 역시 “보편적으로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 있다. “보편의 전당, 궁궐의 글”은 애초부터 내가 깨고 싶은 바위가 아니었다. 사실 저 바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왜 깨려고 하느냐는 질문이 가장 난감하다. 그럼에도 바위깨기를 멈추지 않는다. 견고한 어떤 것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아주 조그마한 균열로 충분하다고들 한다. 나의 글쓰기는 균열을 감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전당이든, 궁궐이든 일단 깨보고 볼 일이다.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 있다. 이 글쓰기 실험이 끝난 후 본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때는 원없이 피칠갑이 되어 장렬히 전사할 것을 고대하며, 오늘도 이렇게 활자더미 잡문 하나를 남겨놓는다.

아라차

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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