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와 수졸에 대하여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풍월로 이름만 겨우 알고 있던 중국 소설 <홍루몽>을 친우들과 같이 읽기 시작했는데, 첫 시간부터 흥미로운 문장들을 만났다. <홍루몽>에 담긴 어마어마한 의미에 대해서는 홍학(홍루몽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문)에 맡기고 그저 사사로운 문장 몇 개를 형편에 맞게 곱씹어보려 한다. “과묵하여 말이 적으니 사람들은 장우藏愚라고 불렀고, 분수를 지키고 때를 따르니 스스로 수졸守拙이라 했다.” <홍루몽>에서 한 인물을 묘사하면서 나온 문장이다. 장우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우둔한 듯한 외양에 감춘다는 뜻이고, 수졸은 자신의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하여 힘써 세상에 … Read more

정상성 유지비용에 대하여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화장실만 빼고 다 은행 거예요.” 한 드라마에서 집 좋다며 둘러보는 선배에게 후배가 한 말이다. 번듯한 직장에 번듯한 외양을 갖춘 그녀가 살만 한 집이라고 생각했지만 80%가 대출이라는 의미. 드라마에 등장하는 집이 대체로 그렇듯이, 내용은 가난한 자를 설정했더라도 사는 곳은 꽤나 멋스럽게 보여주고, 중산층 가정의 집을 묘사하면서도 호텔급 인테리어가 나오는 비현실적인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 보통이다. 드라마니까. 드라마니까 저런 집에 사는 거지 실상은 대출 80%에, 인테리어는 엉망 3분 전이라는 점은 드러내지 말자고 모두가 … Read more

소중한 나의 익명성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공유자전거 따릉이가 나름 쓸 만하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이십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자전거를 타고 가 보았다. 바로 한강이다. 강바람 맞으며 먹는 즉석라면의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 어스름 개늑시의 시간에 만나는 한강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이걸 안 보고 살아왔다니 헛살았다 싶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혼자 만끽할 수 있는 광경과 시간이어서 더욱 좋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고, 산책하러 나온 사람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 Read more

실제로는 없지만 내 앞에만 있는 것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 보시오.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 것을. 그런데 나로 말하자면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고, 방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 세 번째 문지기만 되어도 나조차 쳐다보기가 어렵다고.” 법(法)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는 시골 사람에게 문지기가 이렇게 말한다. 입장하기 위해 부탁도 해 보고, 협박도 해 보지만 문지기의 대답은 매번 “아직은 들여보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골 사람에게 문지기는 법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의 장애이다. 그렇게 … Read more

그게 가스라이팅이에요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살면서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말 중의 하나. 정말 어이없어서 죄송하지만, “예쁜아~”였다. 애인이 애인에게 건네는 말이었기에 참고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삼천년 쯤 없다. 일단 예쁘다 보다는 못 생겼다 류의 말을 자주 듣고 살았기 때문인데다 철 들고 부터는 스스로도 예쁘지 않음을 주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쁜아~”라는 저 말. 애인은 그 때 딱 한 번 말했을 뿐이지만 두고 두고 기분이 좋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왜 예쁘다는 … Read more

지루함과 짜릿함의 역설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드라마는 평온하던 주인공의 일상이 위기에 처하면서 시작한다. 평범하고 무해한 주인공에게 부당한 일이 발생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빌런(악역)까지 등장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주인공은 온갖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선하고 정의로운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하며, 빌런은 갈수록 악랄함을 증폭시켜야 한다. 주인공이 견디다 못해 잠시 흑화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론으로 가기 위한 보조장치일 뿐이다. 왜 그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빌런은 갑자기 결정적인 장면에서 아주 뻔한 실수를 하거나 주인공에게 감화되어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푼다. 주인공은 시작할 때보다는 약간 더 … Read more

아주 그럴싸한 거짓말의 세계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인간의 뇌는 이야기를 아주 좋아한단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구식 이야기에서부터 24시간 스트리밍이 가능한 신식 넥플릭스까지 이야기의 세계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한 친구는 넥플릭스를 두고 “나를 파괴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표현했다. 일상이 무너지지만 그렇다고 끊을 수도 없을뿐더러 유일한 낙이라는 의미였다. 파괴자이자 구원자인 이야기의 세계는 그 무궁무진함으로 틈없이 인간을 유혹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좌뇌라고 한다. 뇌과학자가 아닌지라 뇌에 대한 어떤 설명도 듣고 까먹고 읽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잊지 않고 기억하는 … Read more

나는 무엇을 모를까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병원에 아픈 엄마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서둘러 전화를 누르는데 잘 눌러지지 않거나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거나 하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엄마의 안위를 확인해야 하는데 멍청하게도 그걸 놓치고 있었다는 자책으로 황망해하다가 깨는 꿈. 현실은 이미 엄마가 돌아가신지 14년째임에도. 그래서일까.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훅 올라올 때가 있다. 정말 놓친 것은 없는지 해야 할 일들을 되짚어보지만 현실은 ‘없는데?’라며 멀쩡한 얼굴을 내비친다. ‘진짜 없어?’라고 다시 물으면 현실도 조금 당황하는 듯한 … Read more

남은 건 공허한 문장뿐이지만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나는 오늘 후라이가 될 것이다.뜨거운 바위와 부딪혀야 하기에.피하지는 않을 것이다.후라이를 각오하고 정면승부. 어느 날 아침에 남긴 글이다.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시작했지만 그 날의 약속은 이 후 나의 일상을 적잖이 바꾸어놓게 될 담판을 각오해야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나는 계란이고 내가 부딪혀야 할 대상은 나로서는 웅장한 권력이었다. 돈과 세월이라는 권력에 얌전히 잡아먹히느냐, 마지막 발악으로 빠져나오느냐의 문제였다. 절대 갑을 상대하는 을의 방법은 언제나 미력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무너뜨릴 엄두는 못 냈다. 그 힘이 나에게 … Read more

이제 와서 현대인 코스프레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이미 올드미디어에서 뉴미디어로 세상의 판도가 옮겨진지 오래다. ‘핫하다’는 말도 저물고 ‘힙하다’라는 말이 대세다. 많아진 채널만큼 프로그램도 많아져서 아무리 ‘힙하다’ 해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 부지지수다. 신체는 날이 갈수록 낡아가는데 세상의 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진다. 최근 우연히 팟캐스트 녹음에 참여하면서 뉴미디어를 맛본 일이 있다. 팟캐스트를 위해 읽어야했던 책이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이었다. 소설은 익숙한 듯 하면서도 특이하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뒤통수를 서늘하게 이야기다. [편의점 인간]은 나의 첫 번째 e북이다. 종이책을 살 수도 있었지만 …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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