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와 수졸에 대하여

[ 아라차 ]

:: 철학감수성 - 아라차의 글쓰기 실험

//

풍월로 이름만 겨우 알고 있던 중국 소설 <홍루몽>을 친우들과 같이 읽기 시작했는데, 첫 시간부터 흥미로운 문장들을 만났다. <홍루몽>에 담긴 어마어마한 의미에 대해서는 홍학(홍루몽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문)에 맡기고 그저 사사로운 문장 몇 개를 형편에 맞게 곱씹어보려 한다.

“과묵하여 말이 적으니 사람들은 장우藏愚라고 불렀고, 분수를 지키고 때를 따르니 스스로 수졸守拙이라 했다.” <홍루몽>에서 한 인물을 묘사하면서 나온 문장이다. 장우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우둔한 듯한 외양에 감춘다는 뜻이고, 수졸은 자신의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하여 힘써 세상에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의 지혜로움을 우둔한 듯한 외양에 감춘다.” 자신의 지혜로움을 감춘다? 지혜가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어떻게든 떠벌렸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감출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지혜를 감추나. 아니 그것이 지혜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일단 내뱉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아니던가. 더구나 우둔한 듯한 외양에 감춘다? 삶을 통틀어 한 번도 우둔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적잖이 아이러니한 문장이다. 바보짓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임금이 되는 루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군계일학까지는 아니어도 발군이어야 발탁되어 쓰임을 당하는 세상을 살아왔다고 내면에서 항변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이 과연 모두의 세상이었을까. 감출 지혜도 없지만, 지혜를 감출 줄 아는 지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음이 새삼스럽다.

“자신의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하여 힘써 세상에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수졸에 대해서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한다? 아니 만족할 게 따로 있지 서투른 처세술에 어떻게 만족하나. 우둔함을 가차없이 드러낸 순간들을 회상하며 애꿎은 이불만 내리찼던 게 한 두 번이 아닌 것을. 더구나 힘써 세상에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이나 무쓸모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는 역시 의아한 문장이었다.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하지도 않았고, 힘써 세상에 어울리려 하지 않지 않았기 때문에 두 문장을 이어 붙여 놓으니 뭔가 생경한 느낌이 슥 지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처세술이 서투름을 알고 세상에 부러 나가지 않는 지혜인 것일까? 처세술이야 어찌됐건 일단 세상 앞에 서야 풀칠하며 사는 것 아니냐는 꼰대 목소리는 일단 묵음으로 처리해 놓는다.

지혜는 무엇이고 세상은 무엇일까. 우둔하면 우둔한 채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 세상인 것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는, 완벽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무조건 똑똑해 보여야지만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왜 한 번도 감추고 숨으려 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 장우와 수졸이라는 의미가 눈에 띄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아니 변해버렸고, 변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과거의 그 누군가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지금 여기의 누군가는 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때, 장우와 수졸의 의미를 읽었다면 나는 그저 읽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혜를 감추는 것에 대해서도, 서투른 처세술에 만족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러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반응하고 곱씹는다. 장우와 수졸을 그냥 지나쳤을 때, 다른 누군가는 장우와 수졸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장우와 수졸에 멈춰 섰을 때, 또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것이다. 지혜와 처세술은 때도 가리고 사람도 가리는 것 아닐지. 오늘의 나는 장우와 수졸에 오래 멈춰 있어 보려고 한다.

아라차

잡지기자, 카피라이터, 에디터, 편집장 일을 했다.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간간히 하며 “공부 중” 상태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