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적극적인 자기 파괴의 자리

[ 지니 ]

:: 인문학, 아줌마가 제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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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좌에 대해서는 ‘치고 빠지기’가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경험의 결론입니다. 남 얘기는 개론으로 듣고, 바로 텍스트로 직접 들어갔으면 하는 것이지요. 강좌는 ‘스승-제자’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강의는 강사 개인의 해석이지만, 이 구도 속에서는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의 해석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스승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관습적 관념과, 듣기 행위가 갖는 근본적인 수동성이 강사에 대한 의존도를 또 강화시키지요.

제도권 내의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라는 것이 일찍이 사라졌다고 하지요. 거기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능적 관계, 스승은 스펙과 지식 전달자로 그 위상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제도권 밖의 교육기관이랄 수 있는 인문학공동체에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곳으로는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스펙이나 지식을 쌓으려고 여기로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가, 어느 날 덜컥 주어진 질문을 품고,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해답을 찾으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마 그래서 더욱 빠르게 스승에게, 스승의 말에 바로 무릎을 꿇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스승의 볼모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스승을 모시고, 스승의 일이라면 시간과 돈을 얼마든지 투자합니다. 특정 유명 강사의 값비싼 강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입니다. 똑같은 강좌가 수년 동안 반복되어도 수강생들은 넘쳐납니다. 이런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강좌가 그들에게 아직도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텐데도 말입니다.

좋은 얘기를 듣고 있으면 그 좋은 얘기가 자신의 소유라도 된 듯합니다. 다 깨달은 듯하지요. 그러나 강의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알게 됩니다. 공염불이었구나. 좋은 얘기의 달콤함 때문에 다시 강의실은 만원이 됩니다. 거기가 가장 마음 편한 곳이 되는 겁니다. 자신들이 인문학 공동체를 먹여 살려가며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걸 그들은 언제쯤이면 알게 될까요.

인문학 공부는 세미나로 하자고 나는 계속 주장합니다. 2만 원짜리 세미나를 하자고요. 세미나에는 가르치는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세미나의 반장은 회비를 걷고, 토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방향을 잡을 뿐이지요. 세미나를, 강의 듣는 마음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의도치 않게 선생 노릇도 합니다만, 그것은 반장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더 많이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공부한 사람이 마침 반장을 맡은 격이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세미나에서는 더 많이 준비해 온 사람이 일시적으로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세미나에서는 많이 말하는 사람이 갑입니다. 더 많이 말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더 많이 읽었다, 더 진지하게 읽었다, 더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럴수록 할 말이 많은 건 당연하겠지요. 그러니까 세미나에는 공식적으로는 선생님이 없고, 실재적으로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요.

한 세미나에 선생님이 여러 번 바뀝니다. 말하는 사람이 선생님이 되고 듣는 사람은 학생이지요. 이쪽에서 선생님이 등장하면(말하기 시작하면) 저쪽은 학생들이 됩니다, 저쪽이 선생님이 되면 또 이쪽이 학생들이 됩니다. 계속되는 자리바꿈! 세미나와 강좌의 차이는 바로 여깁니다. 스승-제자의 구도가 없는 게 아니라 스승-제자 구도가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세미나가 무슨 아수라장처럼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바뀌고, 선생님마다 또 의견은 다를 테고 말이지요. 이 아수라장 속에서 공부가 될까요? 혹 말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가 세미나가 파토 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미나란 그런 상황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러니까 싸우기 싫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짓을 한다면 세미나는 강좌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강의를 들을 땐, 어떤 의문이 생겨도 분위기 상,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강의가 끝나면 의문이 사라지기도 하고, 의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지요. 세미나에서는 의문이 생기자마자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말해야한다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세미나에서 말하기는 허락받아야 할 사항이 아니라 당위처럼 이해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세미나가 갖는 장점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미나에서의 말하기는 먼저 의견을 말할 때도, 앞 선 의견에 대해 반대 혹은 동의를 말할 때도,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전장(戰場)에 내 맡기는 행위가 됩니다. 다음 순간에 올 모든 공격에 자신을 처하게 만드는 일인 것이죠. 그래서 모든 말하기에는 용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기는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비판은 상대의 의견에 대해 반대한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하는 순간 자신의 의견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에 비판의 칼날은 자신에게로도 향하지요. 세미나에서 말하기는 적극적인 자기 파괴의 행위입니다. 비판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가 가진 고정관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스승-제자의 구도로 경직된 강좌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강사의 말하기는 가장 안정적인 상태에서 수행되지요. 따라서 강사의 말하기는 자기 파괴에 이르는 말하기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의 경우엔 강의 중에 자기 고정관념의 균열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균열은 대개 자기를 비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재빨리 스승의 견해로 대치하는 것으로 다시 안정적인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언제나, 누구든지 말할 수 있고, 스승-제자의 자리바꿈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세미나가 갖는 조건은 특정 견해에 바로 복종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며칠을 공들여 만든 주장이 한 순간 무너지는 경험,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은 세미나에서 빈번한 일입니다. 불안정은 기본, 일시적일 뿐인 균형, 세미나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공부는 이런 상황 속에서만, 부단히 낡은 자기를 파괴하고 다시금 자기를 구축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든가요?

지니

생각을 넘어가지도 않고
생각에 못 미치지도 않는
말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