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 혁명 혁명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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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데이 커피

처음 문장을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라고 쓰려니 과연 내가 커피를 좋아하나 다시 묻게 된다. 분명 커피를 즐겨 마시긴 하지만 이젠 커피가 더 이상 특별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물같이 느껴져서 좋아한다고 쓰는 게 맞나 싶다. 어디를 둘러봐도 한집 걸러 카페이고 언제 어디에나 손쉽게 마실 수 있는 게 커피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스타벅스에 가는 여자들을 ‘된장녀’라 불렀던 적이 있다. 비싼 프랜차이즈 커피를 마시는 게 허영심의 표상인 것 마냥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일이 이제는 까마득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피숍도 진화한다.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커피숍, 아니 카페만큼 세상 편한 장소는 없다.

이제 커피숍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단돈 몇 천 원으로 카공족들에게는 공부방이고, 회사원들에게는 잠시 몸을 숨기는 장소이며, 어쩌면 호의라고는 받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인생에서 누리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나 같은 맥심커피 성애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결정적 결함에도, 한 컵 가득 들어있는 커피 한 잔으로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떠들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대만족!

 

구걸과 커피숍

며칠 전,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떤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당혹감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지간한 일에는 뻔뻔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수다를 떨러 들어간 카페에서 아주 오랜만에 구걸하는 사람을 봤다. 물론 지하철에서도 종종 무슨 종이 같은 것을 나눠주며 구걸하는 사람을 봤지만, 그때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에는 대놓고 우리 자리에 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이가 몹시 많은 할아버지는 배가 고픈데 밥 사먹을 돈이 없다고 했다. 우리 중 가장 마음 약한(착한) 친구가 지갑을 여는데 종업원이 와서 호통이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신고하겠다는 단호한 목소리다. 당혹스러운 건 다음 순간부터였다.

그는 친구가 준 돈 삼천 원을 그악스럽게 챙기면서 카페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나간다. 힘없고 배고파 구걸하는 늙은이치고는 꽤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다행이다. 진짜 병들고 힘없으면 구걸하러 다니지도 못하겠지. 종업원이 우리에게 와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한다. “요즘 저런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어요.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작은 소란으로 인해 카페의 공기는 잠시 술렁거린다. 공부하던 카공족도 몸 숨기던 회사원도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해친다고 느끼는 순간,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관심해졌다.몇몇 흘낏거리던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도 완전 평온을 되찾았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자 우리는 하던 얘기를 마저 계속 했다. 때 마침 영화는 늙고 돈 없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늙는 것이 두려운가 돈 없는 것이 두려운가에 대한 설왕설래가 오가다가 둘 다 두렵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두려움은, 늙고 돈 없는 사람에 대한 대책을 국가나 가족 어디에도 바랄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한바탕 나라 욕이 시작된다. 누구에게 이 두려움의 실체를 토로해야할지 모르는 우리는 그래서, 현재를 만족하며 건강할 때 잘 살자는 말로 자리는 마무리된다. 아, 이게 아닌데.

 

혁명과 커피숍

한번 상상해보면, 서양식 건물이 우뚝 솟아 있고, 앞에는 넒은 도로가 마주하고 있으며, 문 앞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간판, 위층에는 “우리들 현재 문예계의 유명 인사들”이 열정적으로 논의하거나 사색하고 있으며. 코앞에는 따끈따끈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커피가 놓여 있고, 먼 곳에는 많은 “천한 농민과 노동자 대중”들, 그들은 마시고 생각하고 담화하고 지도하고 획득하고 있으니,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런 것들이 확실히 “이상의 낙원”인 듯하다. (『삼한집』, 「혁명 커피숍」, 그린비, 395쪽 인용)

인간은, 특히 지식인들은 아무래도 죽치고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가보다.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1920년대 중국에서도 가능했다. 혁명 커피숍의 주요 고객은 1928년 현재 유행인 혁명 문학가들이다. 혁명 문학은 “천한 농민과 노동자 대중”들을 위한 문학이다. 내용이야 그들의 각성과 계몽을 위한 것이겠고, 아이러니한 것은 한창 유행인 혁명이니 마르크스니 하는 것들을, 반짝반짝 빛나는 신식 건물인 ‘창조사’ 사무실 2층에서 그것도 노동자 계급이 만든 커피를 홀짝이며 논의하고 사색한다는 점이다.

요즘 식으로 상상해보면 이런 방식일 것이다.

“이집 커피 맛 좋지? 근데 커피 값이 왜 이리 비싸냐. 사실 원가는 얼마 안 한대.”
“홀짝”
“잡지에서 봤는데 아프리카 가난한 어린이들이 일당 500원 받고 커피 원두를 따서 판다더라.”
“홀짝”
“그렇다니 어째 좀 기분이 그런데. 가난하고 비참한 세상은 어떻게 안 되는 걸까. 이놈의 세상 안 바뀌는 거니?”
“후룩, 후루룩, 홀짝”

왠지 낯익은 풍경이다. 이런 방식의 대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안락한 일상에 잠시 불편함이 깃들다 바로 회피하는 방식. 그래도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있지 않냐는 자기기만. 안락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을, 지키고 싶은 무엇들의 공고함.

루쉰은 ‘혁명문학’의 문제에서 ‘혁명’은 무엇이고, ‘문학’은 무엇인가 묻지 않는다. 혁명문학이 무엇인가보다 그들이 혁명문학을 앞세우며 벌이는 기만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대부분이 신지식인이자 현 정권의 휘호 아래에서 움직이는 창조사인들이 혁명문학의 간판을 내걸고 먹은 여러 가지 ‘딴 마음’ 중, 오늘 내가 걸리는 것은 혁명커피숍이다. 커피숍에서 떠드는 혁명 그리고 문학 같은 거.

자신의 안락함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공부가 자신의 안락함을 지키는 방식으로 되는 것. 더 나아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만족하는 것. 이것만큼 혁명과 변화와 공부에 위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커피를 마시면서 하는 혁명문학‘의 태도로 우리의 혁명도, 우리의 공부도, 우리의 삶도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닌가. 맥심 커피라도 한잔 때리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루쉰 선생이 들쑤신 덕에 뭐든 편하긴 다 틀렸다. 이걸 어쩐다?

2019. 7. 27. 해방촌에서 미미 씀.

미미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