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는 누구를 위한 문화인가

[ 삼월 ]

:: 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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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 … 18세 다문화 소녀 “학교가 지옥 같았다” 지난 달 한 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학교폭력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마당에 애석하게도 따돌림이라는 단어가 오래 눈길을 끌지는 않는다. 더 안타깝고, 더 슬프고, 더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는 사건들이 많은 탓이다. 오히려 눈길을 사로잡는 표현은 ‘다문화 소녀’라는 단어이다. ‘다문화’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제는 그 ‘다문화’라는 단어 뒤에 인칭마저 붙었다. 다문화 가정도 아니고, 다문화 소녀. 뭔가 꺼림칙한 단어의 조합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시비를 걸어 본다.

‘다문화’라는 단어가 정착된 때는 언제일까. 2000년대 들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의 국제결혼이 늘어난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러시아 등에서 온 여성과 결혼하는 남성도 늘어났다. 이들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많아지면서,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하던 국가정책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정의 아이들은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외모가 조금씩 달랐고, 어머니가 한국어 사용이 서투르면 자녀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되었든 국가는 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국민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군 단위 지역에서는 외국인 여성이 낳지 않은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2010년대에는 전체 신생아 수의 5%를 결혼이주여성이 출산했다는 통계도 있다. 국가는 이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다문화정책을 제안했다. 결혼이주여성이 이룬 가족을 다문화가족이라 칭하고, 교육과 정착을 위한 각종 지원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결혼은 2000년대 이전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국제결혼과 무엇이 달랐을까. 무엇이 달랐기에 새로이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제도가 마련되어야 했을까.

이 결혼이주여성들은 우리나라에서 명백하게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었다. 사회적 약자이면서 스스로 이 나라에 속하고자 하는 이들로.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교육하고, 보육과 취업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이 여성들이 이전에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들은 한국어와 함께 제과제빵이나 수공예를 배운다. 이 여성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언어나 가졌던 직업들이 국내에서 통용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는 말할 수도 있겠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이주해 살면서 언어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술을 배우는 일이 무엇이 문제냐고. 심지어 이주해온 이들에게 이런 혜택과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무엇이 나쁘냐고. 그래, 나쁘지 않다. 이런 정책이 결혼이주여성들에게 무엇보다 실질적 혜택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범람하는 ‘다문화’라는 단어가 몹시 불편하다.

우리나라의 다문화정책이 다문화가정을 전혀 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둘 이상의 문화가 만나 이루어진 가정을 하나의 문화가 존재하는 가정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 난 모습이다. 다문화정책이 요구하는 대로 단 하나의 언어, 단 하나의 문화가 통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결혼이주여성들은 오늘도 분주하다. 출산과 양육을 해냄과 동시에 언어를 익히고 취업교육까지 받아야 한다.

한국인이 되기 위한 결혼이주여성들의 노력은 국적을 취득한 뒤에도 계속된다. ‘다문화’라는 말은 일종의 낙인이고 꼬리표이다. 이 여성들의 자녀가 자라 언젠가는 학교에 간다. 그때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이름 대신 ‘다문화’라고 불린다. 예를 들면, ‘우리 반에 다문화가 몇 명 있어.’라는 식으로. 다문화는 더 이상 배려를 위한 이름이 아니라, 식별을 위한 꼬리표에 불과하다. 식별은 곧 차별과 따돌림으로 이어진다.

‘다문화’라는 단어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다문화’의 반대편에 있는 문화,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말이다. 순수한 문화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가족은 그렇게 ‘다문화’ 가족의 구성원과 구별되어 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처럼 보이게 된다. ‘다문화’가 존재한다면, 한편에는 다문화가 아닌 ‘홑문화’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문화’의 반대편에 있는 문화,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이렇게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어쩐지 ‘홑문화’라는 말은 무척 어색하다. 문화는 홀로, 혹은 유일하거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는 잡종, 혹은 혼종이다. 혼합과 교류를 통해 문화는 풍부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결국 ‘다문화’가 아닌 문화는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다문화’라는 단어를 만들어내 사용했을까. 우리 모두가 실은 ‘다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따돌림을 당하는 신문기사 속 ‘다문화’소녀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

삼월

삼월에 태어나서 삼월.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한계도 없이 떠들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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