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디 노바디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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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남 아줌마다?

가끔씩 이런 제목을 쓰고 나면 묻고 싶다. 강남이란 무엇이고 강남 아줌마와 강남 아줌마 아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강남에 산다고 강남사람인가. 아니면, 강남적 욕망을 가진 모든 사람이 강남사람인가. 그러나 다음에 생각하자. 지금은 조국 때문에 마음이 부산스럽다.

그렇다. 조국 때문이다. 그 사람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기도 하지만 내 마음이 더 시끄럽다. 왜냐하면 조국 딸이 밟았던 과정은 나와 내 이웃인 강남 아줌마들이 바라마지않던 코스였기 때문이다.

조국의 딸과 같은 세대의 자녀를 가진 당시 우리에게 특목고의 유혹은 성공을 향해 가는 마스터키였다. 이 말은 반드시 특목고에 아이를 보내야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이 분명하니 그 목적을 향해 가는 코스 역시 분명해졌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조기 유학을 보낼 것. 글로벌 전형으로 특목고에 입학하면 교수들이 주최하는 캠프나 각종 논술대회에 보내 수상경력을 쌓을 것.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두 가지 모두 실패했다. 일단 조기 유학을 못 보냈기 때문이다.

조기 유학을 보내려면 부모 중 누군가 교수가 아니라면 기러기 생활을 감수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쉽지 않자 개중에는 초등학생인 아이만 외국에 보내는 집도 종종 있었다. 그런 집 엄마는 현지 가디언으로부터 가끔씩 아이가 밤에 벽을 긁는다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벽을 긁는 아이 때문에 눈물짓다가 아이의 장래를 위해 이를 악무는 날들이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저마다의 집에서 반복됐다. 대치동 학원가로 고액과외 선생한테로.

조국의 딸 문제는 두 가지에서 시작됐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교수의 논문 1저자에 버젓하게 등재됐다는 것, 성적도 안 되는 데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에서 시작된 ‘조국 죽이기’는 그가 장관이 되고 안 되고와 상관없이 돌이킬 수 없어 보인다. 부모 중 한명이 동반하지 않은 조기 유학이 법적으로 금지된 시기에 딸을 유학 보낸 것에서부터 입만 열면 정의와 개혁을 말하던 기만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제 명실상부 악이 되었다.

 

물에 빠진 개와 조.적.조

더구나 흥미롭게도, 이번 사건과 더불어 옛날 조국과 지금 조국의 비교가 한창이다. 과거의 조국이 했던 말이 그대로 지금의 조국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와 조국을 치고 있다. “물에 빠진 개”에 대한 말도 그중 하나다. 루쉰의 말을 들어보자.

루쉰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서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때려야한다고 말했다. 다소 과격한 그의 표현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의 글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과연,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에 빠진 게 사람인지 개인지는 물에서 나와 봐야 안다. 만약 사람이라면 자신이 한 짓을 반성하며 살 것이고 개라면 개의 특성상, 헤엄쳐서 땅위로 올라오게 되면 물에 빠뜨린 사람을 문다. 물지 않는다 해도 하다못해 몸에 묻은 물방울이라도 한바탕 턴다. 그러니 물에 한번 빠졌으니 정신 차리겠지, 라는 어리숙한 생각은 금물이다.

루쉰의 이런 말에 당장 이런 질문이 날아든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다니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물에 빠진 개가 언덕으로 기어 올라온 다음의 태도를 주시해야 한다. 기억도 해야 한다. 도의에 의해 물에 빠진 개를 살려둔 결과 권력자에게 붙고 권력에 붙어 갑자기 우리의 뒤통수를 가격했던 수많은 개들의 예를.

남이 나에게 잘못해도 따지고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서도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직도이다. 서도는 관용의 도이며 직도는 직접적인 도, 복수다.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서 흔한 것은 왕도(枉道)인데 이것은 왜곡하는 도다.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아야한다는 도가 왜곡하는 도인 이유는, 불쌍해서 살려준 뒤 살려준 그 사람이 개에게 물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 개에게 물려본 다음에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과거의 조국이 지난 정권에게 한 말인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말은 현재의 조국 자신에게 돌아와 ‘조국의 적은 조국’이라는 웃지 못 할 신조어를 낳았다.

불안정한 정국이 끼치는 수많은 폐해들 중 하나는, 나쁜 사람은 거리낌 없이 나쁜 짓을 하고 실족해서 물에 빠지면 갑자기 동정을 구걸한다는 점이다. 동정을 구걸하면 그나마 측은지심이라도 발동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조국의 경우, 유독 맥 빠지는 이유는 그 나쁜 짓이 명백히 합법의 이름으로 횡행된다는 데 있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조국은 말한다. 자기는 ‘페어’했다고. 위법을 저지른 게 아니라고.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언제 ‘페어’한 적이 있었던가. 백번 양보해서 설령 다른 모든 분야에서 페어가 인정된다 해도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조국과 조국 아닌, 으로 나뉜다.

고백하건데, 나는 조국을 욕 못 하겠다. 과거 만약 내가 조국과 같은 상위 1%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분명 조국과 같은 방법을 취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조국과 나의 차이점은, 조국은 너무도 스무스하게 이룬 과정들을 나는 엄한 쌩돈을 들여가며 발버둥치다 실패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조국을 봐주지 말자고? 그럴 수 없다. 이건 명백히 조국 하나를 처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합법적으로 그때의 제도를 따라했던 내 자신과 지금도 떨고 있을 여,야당 인사들 모두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봐주자고? 역시 그럴 수 없다. 과거의 많은 “물에 빠진 개”를 청산하지 못해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이 나라의 이 역사적 딜레마를 가뜩이나 힘든 우리의 아이들에게 하나 더 보태줄 순 없다. 하루아침에 교육을 뒤바꿀 수도,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잘못된 건지 정확히 가려내 목을 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째야 하나.

 

노바디 노바디

조국의 사태는 강남 아줌마인 나에게 여러 가지 감정의 방아쇠를 당겼다. 조국을 비난하거나 조국을 은근 부러워하거나 조국처럼 못 해줘서 미안하거나 하는 여러 말들이 여러 얼굴을 하고 들이닥쳤다. 루쉰의 말은 뼈아팠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상황이 있는 거라는 생각도 슬며시 들었다.

그러던 중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다가 조국의 예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발견했다. 고대의 영웅 오딧세우스의 이야기는, 자신의 꾀와 지혜에 넘어가 역경과 고난을 겪는 부분과 그것을 딛고 고향인 이타케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서사시다.

오딧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위대한 아가멤논의 백성이고 제우스가 빽인 사람이다. 한마디로 ‘나 이런 사람’이다. 머리 좋고 위대한 혈통에다가 나를 밀어주는 배경도 든든하고 뭐 하나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인 오딧세우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태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런 자만과 허영심 때문이었다. 자기의 지략만 믿고 괴물을 건드려 목숨을 잃을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그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너의 이름이 뭐냐고 물은 괴물의 물음에 대답한 노바디Nobody, 바로 ‘아무도 아닌 자’라는 대답이었다.

평생을 섬바디 Somebody인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로 살아온 오딧세우스가 스스로를 낮추는 노바디의 순간, 그는 괴물에게 도망쳐 살아나오게 된다. 물론 그 뒤에 다시 방만해진 오딧세우스는 죽을 고생을 하게 되며, 집에 돌아가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기고만장하게 괴물의 집 앞마당에서 그들의 음식과 술을 마음껏 먹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한 일과 똑같은 일이 고향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집안의 양을 마구 잡아먹고 아내에게 치근덕거리는 사내들을 처단하고, 자신의 집 자신의 아내 옆 자리에 누더기로 눕는다. 꼬박 10년이다. 오딧세우스의 10년은 결국 ‘아무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오늘 청문회를 치른 조국-오딧세이와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수많은 성연-조국-오딧세이들이 10년의 섬바디를 벗고 노바디로 살 수 있을까. 물에서 빠져 나와 슬며시 다시 성연-조국-오딧세이의 모드로 돌아가려 할 때, ‘물에 빠진 개’와 ‘노바디’를 생각해내야 할 텐데.

‘나 이런 사람’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된다. 이런 노바디의 순간, 조국은 그가 원래 꿈꿨던 정의와 개혁의 자리에서 무엇을, 나는 내가 꿈꿨던 책과 글의 자리에서 무엇을 노바디스럽게 하고 있을 것임을, 이젠 믿기로 한다.

2019. 9. 6. 해방촌에서 미미 씀.

                                    

미미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