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엔딩

[ 미미 ]

:: 루쉰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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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무 부정적이야

사물과 사람을 볼 때 좋은 점을 잘 보지 못한다. 보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스케일이 큰 사람 축에는 못 드는 편이라 그럴 것이다. 책을 읽어도 사람들을 만나도 온통 딴지걸 것 투성이였다. 이런 부정적인 면이 좋게 받아들여지는 일은 별로 없기에 고쳐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런 성향은 고쳐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그냥저냥 지내왔다. 

이런 성질은 어떤 면에서 인문학 공부에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인문학 공부는 공부를 가르쳐주는 선생의 말이 절대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고, 텍스트를 씹어 먹을 정도로 사랑해야 책을 쓴 이의 의도를 알게 된다는 진심어린 조언 또한 많다. 아무튼 텍스트에 쓰인 주옥같은 말들을 믿는 마음과 믿지 못 하는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어렵사리 공부해왔다.

나의 경우, 공부를 하면 요런 생각이 든다. ‘부정’과 ‘부정적’인 것의 차이는 뭘까 같은 식의. 부정적인 것과 부정의 차이는 크다. 우선 ‘부정적’이라는 말은 비난에 가깝다. 이 말은 심성이 바르지 않다거나, 뭔가 사회 부적응자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반면, ‘부정’은 합리적인 사유로 세상의 비합리나 부조리에 저항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부정적’에 비해 뭔가 번듯하고 대의적이다.

나는 니체와 루쉰의 ‘부정’이 부러웠다. 부정적이지 않고 부정할 수 있는 그들을 열심히 배워야지. 6년의 낮과 밤이 지나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고 ‘부정’할 수 있게 됐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믿음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4월 6일 오후 1시 경, 나는 한통의 문자를 받는다.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S에게서 온 것이었다.

 

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고통은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이 만든 말일 것이다. 그만큼 상실은 고통스럽다. 그것이 한 때 친했던 사람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인간은,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에게 이러면 안 될 일을 수 없이 하고 산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역사를 돌아봐도 그렇고, 개인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인간 조건으로서의 어리석음은 누구나 예외 없는 것이라서, 아무리 나는 안 그래를 외쳐도 소용없다. 사건은 닥쳐오기 마련이다. 아무튼 수년 전, 우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다. 친했기에. 그리고 예외 없이 어리석었기에.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내 앞으로 와 있는 메시지의 내용이다. 메시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1. 자기 생각이 짧았다. 2.미안하다. 3.잘 지내라. 이것은 뜬금없긴 하지만 명백한 사과의 메시지다. 이제 내 결정만 남았다. 답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니까 사과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답장을 하는 것과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답장의 유무는 사과의 여부와 관계  없다. 답장을 해도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고, 사과를 받아들여도 답장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답장에 대해 이리저리 드는 생각 끝에 살짝 열 받는 것은 마지막 인사 부분이다. 1,2 번은 전형적인 사과의 내용이니 그렇다 치고 3번이 주요 포인트다. 상대방의 심리 상태를 들여다볼 순 없으니 확신할 수 없으나,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답장을 원하지 않는다. 잘 지내라는 끝맺음의 인사말에 대한 해석으로 갑자기 머릿속이 분주하다.

답장을 망설이는 데는 이 말의 진심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진심을 다하면 느낌으로 안다. 때로는 말보다 느낌이 더 정확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진심이 느껴지면 용서하겠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진심은 상대방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진심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상대방의 진심은 파악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쨌든 팩트는,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가 나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 착해진다는데

‘용서하지 않음’에 대한 짜릿한 예가 있다. 루쉰의 말을 들어보자.

다만 열이 많이 났을 때 유럽 사람들이 치른다는 의식을 떠올린 기억은 있다. 남에게 용서를 빌고 자기도 용서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적이 많은데, 내게 신식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나를 미워하라고 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차개정잡문 말편』, 「죽음」, 그린비, 776쪽 인용)

용서에 대한 통념은 루쉰에게로 와서 본질적인 곤경에 빠진다. 루쉰의 적들 중 일부는 한 때 뜻을 같이 한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러던 것이 각자의 사상 차이나 입장 차이에 따라 정계와 학계로, 아니면 자연스럽고 그래서 쓸쓸하게 멀어져 갔다. 어제까지 동료였다가 오늘은 신문이나 잡지에 글로 공방전을 벌이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친구는 적이 되어갔다.

적과 원수는 다르다. 원수는 친구가 아닌 경우가 있지만, 적은 원래 친구였다.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적도 될 수 없다. 위의 글을 쓰고 루쉰은 한 달 후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두고 루쉰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적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게 될 미덕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나를 미워하라고 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게 마지막 순간에 대한 루쉰의 미덕이다. 이러한 태도가 미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무도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러리라 짐작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서 ‘인간이라면 마땅히’가 도덕이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아름다운 엔딩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도덕의 영역에 들어간다. 도덕이 아닌 것인 비도덕은 도덕의 반대편에 있다. 비도덕은, 도덕/비도덕으로 분류할 수 있으니 아직 도덕의 영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도덕은 도덕/비도덕의 지평을 벗어난다. 무도덕은 도덕의 저편에 있다.

비도덕이 아닌 이러한 ‘무도덕’은 극단의 정직함이다. 용서할 마음도 없는데 죽는 순간이라고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 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진정한 사과는 끝까지 용서받지 못 하고, 또 용서하지 않은 채로 살다 죽는 거다.

그러니 우리, 도덕적인 사과의 인사는 저쪽으로 치워두기로 하자. 서로에게 ‘용서하지 않음’의 무도덕으로 인해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걸로! 좋은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도덕이어야 할 때 무도덕한 사람이다. 이러한 냉정한 현실 인식이 루쉰의 부정이다. ‘부정적’이 ‘부정’이 되는 지점이 여기다.

여전히 부정적인 나는 루쉰의 부정을 차용하여 답장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상처가 쑤시지 않고 은근 재미지기까지 하다. 사람은 나이 들면 착해진다는데 나는?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아낌없이 낭비했다.   

                                    2019. 4. 9. 해방촌에서
조금 덜 부정적인^^ 미미 씀.

미미

야매 루쉰 연구자이자 야매 철학자. 아무튼 야매.

1 thought on “이런 엔딩”

  1. 가끔 이렇게 골을 패는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쓰게하는 일들이 생기지요. 그런 메세지가 온것 만으로도 황송해야하는건가 하는 생각부터 아니 내가 뭘 그리 부정적이라는거지 . .
    하여튼 인생은 길게 가는겁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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